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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이 Sep 10. 2021

다리 살릴래, 환자 살릴래?

대학병원 정형외과 인턴 이야기.

< 두 번째 대학병원 인턴 이야기 >


수술을 집도하는 것은 매력적이다.

매력적인 만큼 책임도 크다.

백문이불여일견.

'매력적', '책임', 이 두루뭉술한 표현들이 생생한 감각으로 닿았던 순간이 있다.


정형외과는 인턴들에게 근무하기 힘든 곳으로 잘 알려진 악명 높은 과이다.

수술도 많고, 수술장에서 소모되는 체력(과 정신력)도 크고, 수술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도 복잡하고 까다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형외과에서의 1달은 이게 내 길인가 생각했을 정도로 재밌었다.

근무 초반이어서였는지, 수술장 보조가 체질이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1달간 가장 자주 수술을 보조해 드린 교수님은 수술 실력이 상당한 분이었다.

레지던트들은 교수님을 두고 '아마 목부터 발끝까지 다 수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교수님은 근육, 신경, 지방 등 정형외과에서 다루는 신체구조에 생기는 암을 떼어내는 수술을 주로 했다.


그날도 서른 살 정도 되는 여자 환자의 종아리에 생긴 암을 제거하는 수술이 잡혀 있었다.

나는 여느때와 같이 환자를 수술방에 데려와서 수술대에 눕힌 후 기본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수술 중 심장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필요한 전극 스티커를 가슴에 붙이는데 환자의 호흡이 이상한거다.

화들짝 놀라 얼굴 쪽을 올려다보자 입을 꽉 깨물고 온 힘을 다해 울음을 참고 있는 환자의 모습이 보였다.

다만 차마 어쩌지 못한 눈물 줄기가 수술장 환자용 모자(샤워캡처럼 생겼다)에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적시고 있었다.

수술 전날 환자는 암이 다리의 신경을 많이 침범해서 수술을 한 후에는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을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한다.

차가운 수술대에 올라 잠들기 전 그 순간이 환자가 온전하게 걸을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공장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듯 모두가 기계적으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환자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곧 교수님이 들어오셨고 '타임아웃 하겠습니다' 수술장 환자안전을 위한 몇 가지 절차 후 수술시작시간을 띄우면서 수술이 시작되었다.


수술장 시계


교수님은 환자의 종아리를 길게 절개한 후 혈관과 신경을 피해 차분하고 능숙하게 다양한 조직들을 박리(들러붙어있는 여러 조직을 잘 떼어내어 구분해내는 과정)해냈다. 곧 암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암은 두 개의 신경을 둘러싸고 있었다.

두 신경 모두 보행에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라도 손상시키는 경우 환자가 다리를 절게 된다.


암으로부터 첫 번째 신경을 박리해내던 중 난관에 부딪혔다.

예상된 난관이었다.


"하아."

짧은 한숨 소리가 울렸다.

교수님은 흘깃, 날카로운 눈빛을 4년차 레지던트에게 던지며 물었다.

"너가 환자면 어떻게 할래. 암을 남길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정상적으로 걸을래, 아니면 다리 절어도 되니까 다 뗄래? 야, 니가 결정해라"

당황한 레지던트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교수님은 레지던트를 몰아세우며 결정을 재촉했다.

"야, 지금 당장 결정해. 환자 깨워서 물어볼 수 없잖아. 너가 결정하는거야. 너라면 어떡할래?"

원래도 서늘한 수술장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띠, 띠, 환자가 편안한 잠을 자고 있음을 알리는 짧고 규칙적인 기계음이 정적을 뚫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슬의생 수술장 장면. 실제와 꽤나 비슷하다.



"... 조금 더 (박리)해보겠습니다." 레지던트가 우물거렸다.

교수님은 레지던트에게서 눈을 거두고 조심스럽지만 기세 좋게 신경을 마저 박리해나갔다.

"됐다."

교수님의 낮은 음성과 함께 신경이 완전히 분리되었다.

교수님이 레지던트에게 결정을 맡긴 순간부터 숨죽여 호흡하던 나는 그제서야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두 번째 신경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 이건 인턴인 내가 봐도 가망이 없어 보인다.

교수님이 신경과 주변 암 조직을 살펴보다가 다시금 레지던트에게 시선을 던지며 대답을 기다렸다.

시선을 느낀 레지던트는 많은 고민 없이 자신있는 목소리로 응답했다.

"교수님 이건 안될 것 같습니다. 이건 못 살립니다."

대답을 들은 교수님은 시선을 다시 암덩어리로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흠, 그래?"

교수님은 조용히 신경을 분리해내기 시작했다.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던 중, 마침내 신경이 완전히 분리되었을 때, 모두 저마다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교수님은,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고 전해라.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해낸 거야. 아무래도 신경을 계속 건드렸기 때문에 수술 직후에는 기능이 온전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최선을 다 했으니, 앞으로는 환자의 몫이다. 재활치료 열심히 받으라고 해라."

하며 수술을 마무리하고 수술장을 빠져나갔다.


교수님이 떠난 수술장 안은 어떤 경외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간호사, 인턴, 레지던트들 모두가 각자 그 순간을 음미했고, 나는 아까 봤던 환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레지던트들은 교수님 말고 다른 사람이 수술을 집도했으면 아마 이 환자는 제대로 못 걸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높은 확률로 신경을 둘 다 잘라야 했을거라고.


수술장에 함께 있던 모두가 실감했을 것이다.

실력 좋은 외과의사 한 명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수술을 집도하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면서도 큰 책임을 요하는지.


나는 한동안 무조건 수술하는 과를 가겠다고 얘기하고 다녔다.

지금도 수술과에 대한 '뽕'은 여전히 아직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지금은 교수님이 대학병원을 떠나 로컬 병원에 계신다고 들었다. (*1)

교수님이 대학병원에 계시는 동안, 교수님이 집도하는 수술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보조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1) 로컬 병원: 대학병원이 아닌 일반 개원가의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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