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좋아하지 않으려던 날들

5화. 우리가 몰랐던 마지막 봄

by 담치씨

봄이 끝나간다.
교실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이 조금 더 길어지고,
공기엔 분필 냄새 대신 미묘한 이별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도윤은 여전히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엔 함께 썼던 노트,
겹쳐진 손자국,
그리고 말하지 못한 마음 하나.

아무 일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딘가 달라졌다.
그 애의 시선이 자꾸 멀리 있었다.


“야, 너 요즘 왜 그렇게 멍해?”
내가 물었다.
“멍하다고?”
“응. 뭔 생각해?”
“글쎄. 정리 중이야.”

“정리?”
“응. 생각들.”

그 말이 자꾸 걸렸다.
무언가 정리해야 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었다.
그게 불안했다.


며칠 뒤,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떠들었다.

“야, 도윤 전학 간대.”
“이번 주 금요일이래.”

손에서 펜이 떨어졌다.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렸다.
심장이 그 소리에 맞춰 내려앉았다.

“도윤이 전학 간다고?”
“응, 외국으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니, 텅 비는 대신 무언가 쏟아져 나가고 있었다.


그날 하굣길.
늘 걷던 길인데,
오늘은 모든 게 낯설었다.

“너, 전학 간다며.”
“응.”
“언제?”
“금요일.”
“갑자기네.”
“갑자기 정해진 건 아니야.”
“근데 왜 말 안 했어.”
“말하면… 더 힘들까 봐.”

바람이 불었다.
교문 옆 은행잎이 흔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우리…”
입술이 떨렸다.
말끝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도윤은 잠시 날 보더니, 작게 웃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그 웃음이 참 낯설었다.
웃는데, 눈이 조금 슬펐다.


그 주 내내,
교실의 하루가 느리게 흘렀다.
도윤은 평소처럼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 속엔
작별을 알고 있는 사람의 기척이 있었다.

점심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그 애는 늘 내 옆에 있었지만
그 자리가 이상하게 멀었다.


금요일.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교실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도윤은 가방을 메고 서 있었다.

“너 언제 출발해?”
“오늘 저녁 비행기.”
“그래.”

나는 웃으려 했지만,
입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거.”
도윤이 내게 펜을 내밀었다.
“이거 네 거잖아.”
“아니, 이제 네 거.”
“왜.”
“그냥… 나 대신 써.”

그 펜을 받아 들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작은 필기구 하나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너는 왜 항상 조용하게 이런 말 해.”
“그게 나니까.”
“진짜 치사하다.”
“그래도 지금 웃었잖아.”
“아니, 안 웃었어.”
“지금 웃고 있잖아.”

나는 결국 웃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웃음으로.


다시 일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창밖은 햇살로 가득했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차가웠다.

책상 위엔
그 애가 주고 간 펜 하나,
그리고 낡은 노트 한 권이 남아 있었다.

노트 첫 장엔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피하려고 해도, 너무 가까웠던 시간.”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며칠 후,
그 자리에 새 짝이 앉았다.
낯선 목소리, 낯선 필통,
하지만 나는 여전히
습관처럼 옆자리를 바라봤다.

같은 자리인데,
이젠 아무도 없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창문 밖으로 흩날리는 꽃잎이 보였다.
그 순간,
도윤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날 밤,
책상 위에 그 펜을 올려두었다.
빛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 반짝임이 마치
햇살처럼,
웃음처럼,
그 사람 같았다.

봄의 빛은 사라졌지만,
아직 내 안엔
그 애가 남기고 간 온도가 머물러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너를 좋아하지 않으려던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