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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l 02. 2024

그 제주도의 푸르게 설레던 밤

(5)

머리를 말리다 말고 거실로 나간다. 내 예상과는 달리 남자는 내 코트와 백을 옷장에 정돈해 놓고 어느새 룸서비스를 시켜 말끔하게 먹은 것들을 치운 채 식탁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내 책이다. 


“아 미안, 핸드백이 쏟아져서 담다 보니까 책이 있길래… 대체 얼마나 읽은 거야? 이거 무슨 시험 준비책이야?”


그 남자가 그 새 반이나 읽은 채 들고 있는 책은 얇은 시집 한 권이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빠지면서 습관처럼 가지고 다니는 내 비상구, 자끄 플레베르의 ‘이야기’라는 시집. 잠시 쉬고 싶을 때면 어디서고 기대어 아무 곳이나 펼쳐 나오는 시 한 편을 읽는 것이 내 습관이다. 그 읊조리듯 방관자적인 말투를 한 번 곱씹어보는 동안 터질 듯 올랐던 스트레스도 어느 정도 가라앉기 때문이다.


“자끄 플레베르 라… 대충 훑어보니 김 대리님이 좋아하는 시는 어느 것인지 알겠고… 내가 맞춰봐?”


“흠… 말해보던지요?”


남자가 진짜 자끄 플레베르를 알아서 그러는 것인지, 아님 흔한 서울대 출신답게 활자 중독이라 쓰여 있는 것은 일단 읽고 보는 편인지 알 수 없다.


“제일 아끼는 시는… 

‘아침’, ‘데쥬네 뒤 마땅 déjeuner du matin’이지?”


“?”


“뭐 간단하잖아. 내가 펼치자마자 그 바닥이 나오던걸? 얼마나 자주 읽었으면…”


“아아…”


여전히 이 남자가 이 시인을 아는지… 나만큼 그의 시를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는 ‘옥지기의 노래’지만 말야… 아침도 나쁘지 않지. 진정한 이별을 참 처절하게 그렸다고나 할까…”


제대로 연해해 본 적 없다는 이 남자는 처절한 이별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참 잘도 알고 있다. 어째서지…


그가 말했던 ‘옥지기의 노래’를 그다지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사실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야 옳겠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런 비참하고 숭고한 사랑은 못 해 보았다고 해야 맞겠다…


남자가 계속 내 오래된 시집을 여기저기 들쳐 보는 동안 잠깐만 등을 붙여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큼직한 침대가 보인다. 다리를 일자로 뻗고 등을 폭신하게 기대니까 이 좋은 걸 왜 안 하고 참는 고문을 했나 싶다.


“어쭈! 배신? 밤새기로 해놓고?”


“자는 거 아니거든요? 눈 뜨고 있거든요?”


“대한민국 고등학교 정상 졸업한 자라면 다들 눈뜨고 자는 법쯤은 아는 거 아냐?”


"대답도 하고 있잖아요!”


“자면 진짜 이기적인 거다?”


남자가 찬찬히 내가 좋아하는 시 ‘아침’을 읽기 시작했다. 중저음의 공부 잘하는 목소리로…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고, 먹고살아야 하는 노동자가 된 후부터 쪽잠의 능수가 되어갔다. 자다가도 프로젝트 말미쯤 새벽 3시에 서버 다운되었다는 전화가 오면 응급 수술 콜 받은 외과의사처럼 슬리퍼 차림에 택시 미친 듯 타고 여의도로 날아가는 생활을 하다 보니까 그리 되었다. 알람 없어도 인간의 스트레스는 뇌의 여러 군데를 통제하게 마련이다. 오래 자는 것은 죄라고 분명 프로그램되어 있는지 조금만 눈 붙이면 알아서 저절로 화들짝 놀래면서 눈이 떠지게 되는 것이다. 


“헉!! 지금 몇 시예요??”


분명히 시 속의 매정한 남자가 비옷을 입고 문을 나선 것까지 들은 것 같은데…


“나… 안 부장 아냐. 왜 이리 놀래고 그래. 배신 때리고 혼자 잔 주제에… 뭐 덕분에 난 김 대리가 좋아한다는 시를 한 백 번 읽었나… 왜 좋아하는지는 충분히 알게 되었지…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나도 좀 씻었고… 아침도 시켜 두었고… 그리고 분명히 필요할 것 같아서 밑에 면세점도 좀 다녀왔어. 욕실에 가서 대충 흉내는 낼 수 있겠는지 봐주면 좋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남자가 억지로 팔을 잡아당겨 세우더니 욕실로 다짜고짜 밀어댔다. 


면세점 화장품 코너를 싹쓸이했나… 원래 내 돈 주고는 손 떨려서 잘 못 사는 브랜드들로만 진열을 해 놓은 게 보인다. 


“여자들 화장에 그리 많은 것들이 필요한 줄은 몰랐는걸? 

우리 엄마는 집에서 직접 화장을 거의 안 하거든. 뭐 엄마 욕실을 자주 들여다볼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침 예쁜 직원 아가씨가 정말 친절하게 잘도 도와주더라고.”


케이스부터 고급스러운 화장품들을 다 둘러보기도 전에 잠시 몰골을 큰 거울을 통해 보다가 저 남자가 갑작스레 화장품 쇼핑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솟은 원동력을 절로 알겠다. 이 꼴을 보고도 도망 안 간 저 남자는 성인군자다. 자다가 울었나… 대체 눈 밑에 왜 야구선수 같은 검정 반달이 떴는지는 알 수 없다. 남자가 사 온 화장품엔 없었지만 고급 호텔 스위트 룸에는 클렌징 용품쯤은 기본인지 잘도 구비되어 있다. 매일 아침 5분 안에 풀 메이크업을 완성하는 달인의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최대한 신속 정확하게 변장을 시작했다. 


“뭐지? 방금 들어간 것 같은데… 

변신 속도가 이건 뭐 세일러문인데?”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싫어한다. 남자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참에 밖에서 엿듣다가 들어오는 것 마냥 타이밍 절묘한 매니저가 조식을 밀면서 등장했다.


돌이켜보면 고기를 구워댄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뭔가를 또 먹는 것이 약간 어색할 법도 하지만 속 풀라고 예쁘게도 담긴 황탯국에 내장까지 잘 볶아 색이 아주 건강한 녹회색인 전복죽을 보자 자석에 끌리듯 자리를 당겨 앉게 된다.


“신 여사님 물김치 여전하겠죠?”


아니 이 반찬 물김치를 만든 아줌마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남자는 소울푸드라도 만난 양 고운 주황빛을 띤 나박 물김치부터 맛을 보기 시작한다.


“먹는 걸 많이 좋아하시는군요, 우리 장 선생님. 매우 점수를 주고 싶은 부분이에요.”


사실이다.

나는 맛있는 것을 좋아하고 찰나의 즐거움을 위해 맛집 앞에서 같이 한 시간을 즐겁게 기다려주는 남자를 찾고 있었다. 인생 뭐 있어? 맛있는 거 실컷 먹고살면 그게 행복이지…


“어. 난 맛있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지. 인생 뭐 있어? 어차피 짧은데… 순간순간 맛있는 거, 재밌는 거 제대로 하는 게 시간 활용을 잘하는 거지.”


이런…

어쩌면 우리는 두 미식가 염세주의자가 잘도 만난 것인가…


“어제 나더러 굶을 걱정은 없으니 아무 생각 없이 노는 루저로 지낼 생각이냐고 했지? 굳이 말을 할까 말까 생각했었는데, 우리 일 잘하는 김 대리님은 너무 한가한 한량을 별로 안 좋아하실 테니까 나도 마냥 놀기만 할 예정은 아니란 걸 말해줄게. 사실 난 내년에 휴직을 하는 이유가 있어. 미루다가 영영 못하게 되기 전에 하고 싶은 걸 하나 하려고.”


“…?”


“내가 정말 좋아하던 복국 집이 있었거든? 그런데 그 할머니가 기술 전수를 못 하고 돌아가셨지. 그 주방에서 일하던 사람이 인수받아 하긴 하지만 그 맛이 아닌 거야. 내가 기억하는 그 맛이… 그래서 아예 내가 복어조리 자격증을 땄어. 그걸 시작으로 할 줄 아는 요리가 좀 생겼지. 요리책 하나를 해보려고 해.


평생 한 가지만 해야 하는 직업군으로 들어왔지만 더 늦기 전에 살짝 재미있는 것도 한 번 해 보고 싶은 욕심이랄까. 그런 의미로다가… 다음 주 강원도 낚시 떠나기 전 집에서 복국 끓여 줄게. 그거 먹고 가자. 나 좀 끓이는데… 먹어보고 평가 부탁해. 경상도 여인이니 제대로 된 복국을 감별할 수 있겠지. 난 지리보다 얼큰한 쪽을 선호하거든.”


“당연히 복국은 싸하게 얼큰해야지.”


어렸을 때 아빠가 과음한 다음 아침엔 엄마가 동네 복국집에 가서 냄비째 국을 받아오곤 했었다. 아줌마가 작은 비닐 주머니에 따로 싸주는 양념장을 풀어 다시 한번 끓여내면 온 집안에 퍼지던 그 새큼하게 탁 쏘는 알싸한 매운 향 사이 향긋한 그 미나리 냄새… 남자가 복국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새 코 끝에는 그 어린 시절 복국 향이 맴돌고 있다.


“것 봐.

먹을 줄 안다니까…

그럼 내가 제대로 된 복국 끓여줄 테니 기대해. 주중엔 보자면 매인 몸이라 어쩌고… 하실 테니… 아예 주말로 잡을게.”


“오케이!”


기대된다.

드라마고 영화고 그놈의 스파게티를 삶아대는 남자는 흔히 보았어도 자격증 가지고 복국 끓여주는 남자라니… 


아직도 작은 비명을 지르며 보글거리고 있는 뚝배기 속의 황태 국물을 한 술 떠 본다. 이렇게 정갈하고 날씬하면서 깔끔한 콩나물은 어디서 구하는 걸까 궁금해하는 참인데 남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어머니. 아뇨. 일 있어 온 건 아니고요. 좀 있다 서울 갑니다. 알고 있어요. 오늘 작은 어머니 생… ……”


남의 통화를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굴고 있었지만 갑자기 세상이 멈춘 듯 적막이 흐르자 나도 모르게 통화를 이상하게 끝낸 건가… 하고 남자를 올려다본다. 그는 여전히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지만 어정쩡하게 일어선 자세로 굳어 있었다.


“문자로 보내 주세요. 저 지금 공항 가요.”



안녕하세요 여러분^^ 아젤입니다.

연재가 하루 늦었어요. 사는게 바빠 요일을 깜빡했지 뭐예요^^

가끔 댓글을 남겨주시면 저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보셨다면 그냥 나가지 말고 한 마디 남겨주십사 부탁드려봅니다.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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