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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만 보고 있다.

(4)

by Hazelle

“복학생 오빠야는 아직 군대 티를 못 벗었나 봐. 뭐 행군이라도 한 모양 3분 샤워 좀 하겠습니다. 이러더니 욕실로 직행했어.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하는 분이 와서 살피니까 먼지가 있거나 하진 않을 거야. 왜 가방도 아직 안 풀었어?”


“뭐랄까… 하도 잘 정돈되어 있어서… 마치 지금도 이 방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다고나 할까… 괜히 어려워서…”


“… 네가 무당이 아닌 다음에야 이 방 주인이 나타날 리 없으니까, 가방 푸시오, 낭자.”


“언제… 떠나셨는지 물어도 돼?”


“그럼. 뭐 그렇게 비밀이라고… 좀 되었어. 고모가 마흔다섯쯤… 그러니까… 내가 스물 하나였나… 그때쯤…”


“아… 나는… 아기 용품들이 있길래… “


“우리 고모 결혼 안 했어. 아이를 가지지 않으려고…”


“아…”


내 한낱 작은 호기심으로 더 캐묻기엔 그의 얼굴은 너무 어두워 보였다.


너무 일찍 떠난 고모 이야기를 묻는 것은 큰 실례인 것 같아 애써 다른 이야기를 꺼내 보려 했다.


“빙어 낚시는? 곧 저녁시간인데… 금일 시행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만…”


“무신 빙어 낚시래요, 빙어 낚시는… 내일 엄청 춥다는디… 오늘 따땃하게 잘 주무시고 내일 날래 서울로 가시래요. 여기는 한 번 추우면 욕 나오게 춥다니까.”


“에이, 아재요, 그래 봤자 철원에 비하면 껌 이지예.

제가 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육군, 그중에서도 최전방 근무 병사 아니었습니까!”


정말 밖이 코 떨어지게 추운 모양 코가 빨갛다 못해 거무죽죽해진 낯선 아저씨와 그야말로 물만 끼얹고 나온 제대 병사 민 병장이 티셔츠만 입은 객기 넘치는 모습으로 처음 보는 아저씨 옆에 아들인양 붙어 서 있다.


“이보래, 총각. 미친검매? 이 날씨에 웬 반팔이고. 이 집 하도 불을 안 때서 추울 거 같아 내가 부랴부랴 보일라 제대로 돌기 전에 따뜻하라고 장작을 이만큼 갖고 왔구마는.”


아마도 이 집을 가끔 돌봐주는 아저씨인 모양이다. 낯선 아저씨는 처음 보지만 강일이 오빠가 한심한 것을 이미 파악한 고수다.


“잘 지내셨죠, 여전하시네요.”


“아이고, 맨 똑같은 시골 생활이 뭐 짜달시리 변화무쌍 할게 무에가 있을라고요. 우리 선상님도 잘 지내셨소. 병원을 때리 치웠다던데. 참말이오?”


아마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다. 아저씨는 반말을 쓰지 않았지만 장 선생을 꼬마 대하듯 하고 있었다.


“이제 따뜻해지기 시작하네. 그라믄 내가 퍼뜩 가서 요깃거리 좀 봐 올라는데… 회를 좀 떠올까 하는데?”


“좋지요. 그 할매 집에서 좀 구해주세요, 아저씨. 소주도요. 강원도 소주… 캬… 세잖아.”


“무신!! 이 무신 큰일 날 소리를… 요새도 술 처먹나? 큰 사모님한테 연통을 좀 넣어야겠구만.”


“아니에요. 아저씨. 여기 저만 있나요? 저 경상도 남매가 진짜 끝내주는 술고래라고요.”


“아… 그렇구마이… 댁들도 젊은 거 믿고 술 너무 퍼마시면 안 돼.”


아저씨는 아까부터 본인 입김에 막걸리 향이 진하다는 것을 진정 모르는 것인가…


“잠깐만… 아저씨 한 잔 하셨구만. 차 몰고 가시는 거 아니죠??”


“걱정 마. 아들래미가 운전수로 따라왔응께. 춥다고 차 안에서 꼼짝을 안 해. 차 몰고 오니라고 무리했을 건데 어여 쉬소. 내 후딱 요기거리들 봐올게.”


“항상 고마워요, 아저씨.”


가만 보니 전국 방방곡곡에 이런 숨은 아저씨들을 두고 있다.


아저씨가 지핀 벽난로가 서서히 마력을 뽐내기 시작한다. 경상도 고등학교 선후배 둘과 아무 인연도 없고, 어쩌다 채팅방에서 만난 휴직 중인 의사 선생 그렇게 희한한 조합의 세 인간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저씨를 기다리는 동안 또 닭이 되어 전 국민의 친목도모 게임, 삼육구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나 진심으로 이 경상도 남매랑 노는 거 너무 재밌잖아. 아마 또 재수 없다 할지 모르지만 말야, 나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미친 듯 깔깔대면서 놀아본 적이 처음인 것 같애. 그대들은 참으로 순수한 것이 가식이 없구랴.”


방금 또 걸려서 등짝에 불나도록 ‘인디안 밥’을 당하고도 깔깔대는 장 선생이다.


“에이… 형님 공부 잘하신 거야 잘 알지만서도, 그래도 단 한 번도 이렇게 바보같이 놀아본 적이 없다는 건 좀 뻥 아입니까.”


“아냐. 장 선생님이 말하는 건 진짜로 그렇다는 거야.”


“설마… 그라믄… 관상대로 영원한 싱글인 것도 맞는기가??”


“뭐야, 아까는 여복 많다면서.”


영원한 싱글이란 말은 거슬리는지 장 선생이 못마땅한 듯 눈썹을 살짝 올렸다.


“붙는 여자는 엄청 많은데 뭐 이어지는 건 잘 없는 걸로…”


“아우, 듣지 마. 저 인간 말. 어디 지리산이나 계룡산 들어가서 사부 모시고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고, 보초 서다가 심심해서 후임한테 몇 개 주워들은 걸로 저러는 거야.”


“뭔 소리! 그 후임이 얼마나 대단한 안데.”


“뭐가 대단한데. 박수무당 아들이면 대단한기가?”


아니 원불교는 미신 믿어도 된다고 권장하나… 군대 다녀온 후로 자꾸만 관상이니 사주니 들먹이는 강일이 오빠가 마뜩지 않았었다.


“어허이. 보통 무당 줄기는 신 모셔서 막 그 신이 떠드는 대로 전달만 하잖아. 그런데 이 놈아 집안은 사주, 관상까지 섭렵하는 그런 하이브리드 무당 집안이여.”


참… 할 말이 없다.


“니! 생각을 해봐. 우리는 진짜 일 분 후에 뭔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다이가. 그라고 운명이 없다면은, 그저께 우리 황천길 고속도로 탔는데 구사일생한 것은 뭐라고 설명할 끼고.”


“미친나…

남의 집 귀한 딸 같이 죽게 할 뻔한 얘기를 또 왜 꺼내는데.”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 인간의 머리와 힘으론 해결 안 되는 일들이 널렸다고. 그러니까 무조건 그런 걸 미신이라고 몰아붙일 일도 아니라고.”


어느새 조용해진 장 선생을 잊고 둘이 옥신각신 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분위기 잡는답시고 켜 둔 촛불들이 꺼진다. 벽난로의 불도 갑자기 테크노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뭐지… 괜히 무서울 뻔했다.


그새 횟집을 다녀온 아저씨가 문을 열었다. 아저씨의 말 없는 아들도 냄비째 아직도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매운탕을 들고 문턱에 서 있었다.


“이 날씨에… 정말 감사합니다.”


장 선생이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더니 키 반을 눕혀 감사 표시를 했다.


“아이고… 무신… 별로 하는 것도 없이 따박 따박 월급 받는 것도 죄송시러운데… 뭐 이까짓 거 가지고 허리를 이렇게나…”


아저씨가 정말 어쩔 줄 몰라하며 같이 허리를 굽혀 맞절을 하신다. 촛불 꺼졌다고 식겁했던 두 시덥이도 엉거주춤 일어난 둥 만 둥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다.


“괜찮겠시요? 저번에도 오셨다가는 오밤 중에 이상한 거 보인다고 뛰쳐나가시고…”


“… 뭐 오늘은 혼자가 아니니까… 날씨 점점 안 좋아지는데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이제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예예… 아까 보일러도 봤고, 온수도 좋고, 대충 내일 드실 거까정 갖고 왔지비… 뭐 그래도 어디 아수운 거 있음 전화 바로 바로 합소.”


아저씨는 자꾸만 뭐 잊은 사람 마냥 집 안을 훑다가 미심쩍은 듯 주저하는 발걸음을 돌렸다.


세간이 익숙한 모양 장 선생은 어느새 어디선가 큰 마호가니 상을 가져와 펴고, 꺼진 촛불들을 다시 살리더니 있는지도 몰랐던 작은 다락에 올라가 촛대며 오래된 전축과 레코드 판 몇 개를 가져왔다.


아저씨가 가져다 주신 진수성찬들을 펼치고 마지막으로 보자기를 풀자 강원도 소주가 박스채 놓여 있었다.


“역시… 지방마다 소주 맛보는 게 취미인걸 아신다니까…”


장 선생이 도착한 내내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던 표정을 거두고 웃어 보인다.


“강원도 소주라… 전방 근무할 때 많이 마셨지예. 뭐랄까.. 마 친절하지 않지만 배신은 안 때릴 거 같은 그런 전우의 맛이랄까예? 마 이해가 가십니까?”


저 인간이 술 한 방울 안 걸치고도 저런 뜬구름 같은 소리를 지껄이다니…


“마 이해가 팍팍 갑니더. 바로 그기라예. 그런 의미에서 우리 마 내추럴하게 아무 군더더기 없이 딱 소주 맛 한 번 감지해 볼까예?”


한 마디 할라는 참인데 장 선생이 이미 팔꿈치로 소주 뒷 통수를 두 번 때리더니 급하게 마개를 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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