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충성스러운 개
스위스 취리히에서 유럽 미디어 협회 주최의 세미나가 있어 가는 길이다.
이번 발제자는 디노 발레스트라.
유럽 미디어계의 실력자 중 하나인 그와는 3년 전 파리 한 사교 모임에서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이태리계 스위스인인 그는 아버지가 이탈리아인으로 태어나기를 황금사자 등에서 태어났다 일컬어질 만큼 막강한 집안의 자제로 20대에 이미 본인이 설립한 언론사를 급성장시킨 대단한 남자다. 이 남자의 모친인 발레스트라 여사는 내 어머니와 같은 사교클럽이라 오래전부터 안면이 있었지만 희한하게도 그와는 기억이 없다.
세월이 흘러 일 때문에 참석한 자리에서 가졌던 그와의 만남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듣던바대로 기품 있고 강한 인상이었지만 그가 건넨 첫인사가 썩 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캐비어 카나페와 샴페인 한잔을 서버에게서 집어 올릴 때 그가 불쑥 내게 말을 건넸다.
“마리나 씨는 지난달 잡지 인터뷰에서 봤던 것보다 실제가 더 아름다우시군요.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혼자라니 세상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 투성이지 뭡니까. 하하”
그가 내게 한 첫마디였다.
물론 그가 디노 발레스트라 란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먼저 본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또 내가 나를 소개하기 전에 내 이름을 불렀다는 것 또한 비위에 맞지 않았다.
무례한 남자에게 으레 20대의 내가 했던 ‘난 네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낸 후 조용히 자리를 뜨는 ‘무시하기’ 따위는 속으로만 할 수 있다.
왜냐면 결혼 후 만나는 모든 남자는 ‘남자’라는 개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자’ 혹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뉘기 때문에.
디노 발레스트라는 100퍼센트 전자에 속한다.
그때 나는 그에게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대꾸했었다.
“물리적으론 혼자입니다만 전 여전히 결혼생활 중입니다. 실제론 혼자가 아닌 셈이지요.”
그럴 필요 까진 없었는데 결혼반지까지 그에게 보여준 건 과잉반응이었지 싶다.
그는 내 반지를 흘끗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런 상태를 남들은 다 아는데 본인만 모르는 ‘천천히 헤어지기 과정’ 이라고도 하죠.”
솔직히 말해 그날 나는 그 자 때문에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대꾸할 새도 주지 않고 그는 나와의 대화가 생각보다 따분하다는 듯 마침 뒤늦게 도착한 조니 홀리데이(*프랑스 락앤롤의 대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아랄도 와 친구이기도 한 조니가 나를 대화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난 디노와의 자리가 불편해 얼른 딴 곳으로 피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그가 옳았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가 업계 사람들에겐 이미 알려져 있던 나와 아랄도의 불화설을 흘러 듣고는 아는 체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그 당시에도 나는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욱 불쾌했을지도...
일 때문에 가는 것이지만 그런 그와 다시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이 또 이번엔 함께 진행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이 여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해 사적으로 알려진 바는 몇몇 알만한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대충 오래전 유명한 모델 겸 영화배우 출신인 이태리 여인과 이혼한 이후 오랜 기간 싱글이란 것 외엔 없었다.
같이 일을 하게 되더라도 사적인 얘기는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에게 쓸데없는 신경을 쓰기 싫어 기차에서 읽으려 준비해 갔던 책을 펼쳤다.
좀 유쾌하고 가벼운 책을 사러 서점에 들렀었는데 집어온 것은 결국 어둡고 궁상맞기 그지없는 이별한 한 남자의 ‘모노로그’다.
몇 년 전 베스트셀러였고 그 이후로도 내내 스테디셀러라 서점에 가면 늘 보였던 책인데 결국엔 사고야 말았다.
한 남자가 부인의 외도를 알게 된 후 견디는 한 달, 그 한 달간 남자의 감정의 움직임과 심경의 변화, 결심을 참 처절하고 어둡게도 그려 놓았다.
작가 본인의 얘기란 말은 어디에도 없지만 왠지 이 정도로 섬세한 표현을 할 수 있으려면 본인의 이야기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헌사도 프롤로그도 에필로그도 없는 이 얇은 책 한 권을 대체 며칠 째 몇 번째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책 속의 남자는 엄청난 가문에서 태어날 때부터 가진 힘과 돈으로 이른 성공을 했고 완벽한 미인과 결혼을 했다.
그녀는 허영심이 대단한 여자였지만 남자의 재력과 권력은 그녀의 그 정도 허영심을 항상 만족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여자는 남자가 선물한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의 수만큼 그를 사랑한다고 맹세했다.
남자도 그녀가 그가 아닌 그가 가진 힘과 재력을 사랑한다는 것쯤은 알만큼 똑똑했지만 그는 괜찮았다. 그가 가진 힘과 재력도 역시 그의 일부였으니 그는 그녀가 그의 전부를 사랑하진 않지만 일부만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에 만족했다.
문제는 그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이었다.
남자는 치밀하고 똑똑했으며 세상사에 통달한 혜안마저 지녀 그녀의 상대가 누군지를 금방 알아낸다.
그 남자는 놀랍게도 그녀의 수동 클래식 벤츠를 자주 손보아 주던 기술자였다. 그는 가난했고 배움이 짧았다. 잘못된 부모를 둔 탓에 버는 것을 모두 빚 갚음에 넣어야만 하는 무거운 가난을 짊어진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젊고 아름다왔으며 그 지긋지긋한 현실에서도 유쾌하게 웃을 줄 아는 매력적인 남자였다.
남자는 청년의 존재를 알게 된 후 매일 밤 견디기 위한 일기를 쓴다.
아내가 늦는 날이면 어쩌면 그 수리공의 낡고 좁은 아파트에 같이 있을 둘을 상상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와 그녀를 한꺼번에 제거할 무시무시한 복수극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초반엔 극을 달하던 그의 증오는 어느새 불안과 초조로 변질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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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당신이~' 시리즈는 카카오페이지 계약이 연장됨에 따라 그 곳에서만 연재하겠습니다.^^ 후속편은 그 곳에 이미 올라와 있습니다.
브런치에서는 새로이 '라 비타 에 벨라' 연재로 대체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