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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넛커피 May 17. 2023

오늘 저녁은 빨간 맛

미션 파서블

  

Photo by Jeff Sheldon on Unsplash


  어제저녁 잠들기 전에  와이프가 한 마디 한다.


"오빠,  부엌이 뭐가 었는지 바닥이 끈적해. 내일 일찍 오면  걸레 좀 밀어줘~!"


이렇게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심부름시키는 존재가 얼마나 있던가.  아마도 엄마 아닌 엄마다.

마음속으로  '네가 하지~'라는 말이 떠오르고 알고 있으면서 미루는 것 같아 살짝 짜증이 또 났다.  가끔 오후 반차로 일찍 집에 오게 되면  오후 반나절을 온전히 쉴 만큼 일찍 오는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잡다한 일들을 처리해야 할 때가 있다.  저녁 전에 잠깐 남는 꿀 맛 같은 시간이 생각보다 얼마 없는 것이다.


  어쨌든 오늘이 돼서 퇴근을 하고 예정에 있던 일이 하나가 취소되는 바람에 좀 더 일찍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청소 말고 김치찌개도 끓여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거절했었다.  그러니 찌개는 자기가 와서 끓여줄 테니 걸레질만 좀 해달라는 미션이 남아있는 것이다.

  사실 부엌 공간이 넓지도 않아서 걸레질하는 게 오래 걸릴 일은 아니었다. 직장에서 일할 때 몸을  좀 쓰는 일이어서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욕심 때문에 거부감이 드는 것도 있다.  저녁만 되면 힘이 죽 빠지고 온몸에 근육통이 와 정말 꼼짝달싹 하고 싶지 않은걸 와이프는 이해하지 못한다. 도착해서 잠깐 쉬었다가  스팀걸레에 물을 보충하고 잽싸게 바닥을 닦았다. 그냥 한 김에 찌개까지 끓여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나는 요리 똥손이라는 것.


  어제 돼지고기 사놓은 것이 있다고도 들었기 때문에 대충 풍덩풍덩 재료들 넣고 끓이기만 하면 또 쉽게 끝나지 싶어서 고기를 찾아봤다.

  '두둥~!'

 고기가 손질된 찌개용 고기가 아니라 구이용 목살 같이 얇고 넓적한 것이 겹겹이 뭉쳐있다. 고기를 썰어야 하는데 시작부터 귀차니즘이 확 올라온다. 냉장고 문을 닫고 잠시 또 고민에 빠진다.

  '놔두면 와서 할 텐데...'

 처음엔 청소, 안 하기로 돼있긴 하지만 두 번째로 김치찌개까지 뭔가 미션이 간단치 않고 번거로운 것 투성이다. 마치 옛날 우스갯 농담처럼 군대에서 동전 몇 개를 후임한테 쥐어주며 담배 한 보루하고 과자 몇 봉지, 음료까지 사고 천 원을 남겨오라는 미션처럼  말만 간단하고 미션 완수까지 첩첩산중인 느낌이다.


  고기는 600g이다. 찌개에 다 넣자니 많고 그냥 남기자니  다른 반찬도 있고 오래 두기도 애매하다. 우리 부부는 맞벌이다 보니 집에서 한 끼만 해결하기 때문에 조금만 방치하면 아까운 식재료를 해치우기도 전에 변해서 버리기 쉽다.  물론 적당히 알아서 소량씩 구매하고 소진해 버리지만  당장 고기 앞에서 또 고민에 빠졌다.

  '그래!  절반은 찌개, 절반은 볶음을 하자!'

쿨 하게 결정을 했다. 오래 끌어봤자 시간만 갈 뿐이다.

집에 있는 채소와  재료를 이용해서 해치우자는 결론이다. 제육볶음이나 두루치기류는 밀키트나 배달도 맛있게  많이 팔지만 와이프는 배달음식도 외식이라며 시켜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난 아닌데...)


  레시피를 검색해 본다. 여러 개 찾아볼 것 없이 검색으로 나오는 자료 중 제일 위에 것을 누른다. 예전에도 비슷하게 먹을 때 이것저것  찾아봤지만 블로그의 레시피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냥 내가 있고 겹치는 재료들 중에서 크게 겹치는 줄기들만 비슷하게 넣고 본다.


고기의 큰 덩어리를 반으로  자르고 찌개에 들어갈 고기는 더 잘게 자른다. 비개덩어리는 찌개가 느끼해질 수 있어서 많은 부분은 제거한다.  백종원 김치찌개 레시피는 고기를 볶지 않고 물을 넣고 바로 끓인다.  고기 자체에서 우러나는 육수를 국물 베이스로 이용하게 하는 것 같다.  나는 새우젓 1큰술을 넣고 끓였고,  끓일 때 올라오는 하얗게 뜨는 거품은 그대로 둔다. 제거했을 때 더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겠지만 이 자체도 감칠맛을 느끼게 하는 역할도 있으니  그냥 둔다.  사실 걷어내는 것이 귀찮은 것도 있다.

  김치는 쉰 김치는 아니지만 듬뿍 넣는다. 고기가 많으니 두 배 이상 넣어준다.  쉰 김치의 신맛을 잡을 필요가 없으니 따로 설탕을 넣지 않는다. 어차피 양파를 넣으면 국이든 찌개든 볶음이든 단맛이 올라온다. 많이 짜게 먹진 않지만 간이 밍밍하고 싱거우면 국간장에 나는 아주 적은 양의 액젓을 추가한다.  소금도 상관없겠지만  국간장은 여러 큰술을 넣어도 금방 잡아주지 못하는 간을 액젓은 반 큰술만 넣어도 끌어올려 주어서 언젠가부터 조금씩 활용해보고 있다.


김치찌개  끝!



  이제 남은 고기 반덩어리를 웍같은 팬에 넣는다. 따로 고기 밑간도 하지 않고  다른 기름을 대신해서 참기름  살짝 넣고 다져진 파 남은 것을 미리 넣어 파기름처럼 활용한다. 참기름은 올리브유나 다른 기름들보다 고소함을 강화시켜 주면서 조금만 넣어도 고기 볶기 아주 좋다. 고기가 익어갈 때쯤 미리 만들어놓은 볶음양념장을 절반 들이붓는다.

양념장은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1:1로, 매실청과 간 마늘, 맛술 조금만 넣어서 적당히 진득하게 만들었다.  너무 묽어지면 야채가 익을 때 나오는 수분 때문에 볶음이 찌개처럼 될 수도 있고 간도 심심하게 맛이 덜해질 수 있다. (이런 것들은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색과 농도가 적당한 듯 보일 때 잘 두었다가 고기만 익으면 바로 넣고 고기부터 볶는다. 고기가 빨간 옷을 입고 매콤하게 간이 배고 그다음 남은 양파, 파도 넣고 마침 또 오랫동안 활용하지 못하고 냉장고에 남아있던 파프리카도 대충 잘라 뭉텅뭉텅 넣는다.  볶다 보니 색이 생각보다 연하다. 물은 다행히 많이 생기지 않지만 맛이 약해 고민에 빠진다.  

그래 고추장 크게 떠서 한 큰 술 더 넣고 이제서 설탕을 얼렁뚱땅 흩뿌려 맛을 더해준다. 그리고 휘휘 저으면서 더 볶으니 색도 더 볶음 같은 색이 되고 맛도 더 매콤 달콤해졌다.

아까 야채 들어가기 전에  냉동실에 있던 냉동새우랑 오징어링이 있어 미리 볶았으니 고기랑 같이 해물볶음도 되는 것이다.  부추 남은 것도 애라 모르겠다 하고 투척.


알 수 없는 돼지고기 해물볶음 끝!


  드디어 모든 요리가 끝났다. 결국 퇴근 시간하고 또 얼마 차이가 안 나게 돼버렸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와이프 대신 저녁준비를 해서 그런가 약간 보람 있으려고 한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메뉴들이 다 빨간색이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저녁은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쓰는데 와이프에게 전화가 오니 살짝 잠깐 소름 돋기도 하지만 오늘 저녁도 잘 먹고 완전한 휴식을 만끽하며 남은 하루를 보내야지.

이쯤 되니까 예전에 어떤 유투버 실시간 방송을 보는데 누군가 실시간 채팅창에 적은 말이 떠오른다.

'혹시 누군가에게 위협을 느끼거나 어려운 상황에 빠진 거라면 말하지 말고 손을 흔드세요'

 그렇다. 나의 글은 S.O.S  요청이 아니다. 누가 보면 와이프한테 엄청 혼나고 지내는 줄 알겠네. 다음엔 밀키트나 하나 미리 사놓아야지.  


- 찾아보니 야채와 채소 모두 표준어라고 하네요.
- 내용에는 일부러 레시피를 자세히 적지  않았습니다. 재밌게 봐주시고 자유롭게 느끼고 만들어 보세요.


  - 2023.05  늦은 오후, 저녁준비해 놓고 보기 좋은 음식물쓰레기가 되질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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