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론에서 벗어나기(상)
정치학 세미나를 들으면서 '세대'라는 주제를 듣고 쓴 글입니다. 한국에서 90년대 생으로 살아오면서 일터에서, 학교와 가정에서 다른 세대들과 조우하면서 '세대'라는 어려운 주제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이 글은 저와 같은 세대들에는 생소한 역사로 남아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다룹니다. 방대한 논문과 연구 자료, 학술 기록들을 참조한 글이 아니기에 전문적이거나 학술적인 요소들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사, 공순이라 불렸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들을 참고하여 구성한 글입니다. 어디까지나 그냥 사회학을 기웃거리는 20대의 글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88만 원은 2007년 기준 비정규직 평균 임금 119만 원에 20대 급여 평균비율을 곱한 수치이다. 2007년에 출간된 우석훈·박권일이 쓴 ‘88만 원 세대’는 20대의 95퍼센트가 비정규직이 될 것이라는 예측 아래서 한국 세대 간의 불균형에 초점을 맞추어 구조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13년이 지난 지금 서점가 베스트셀러 코너 한 자리에는 ‘90년 생이 온다’라는 책이 진열되어 있다. 저자는 자신이 태어난 시기와 현 취업시장에 들어와 있는 ‘20대들이 무언가 다르다.’고 문제의식을 가져서 집필을 시작했고 책은 히트를 쳤다. 특정 세대를 첨예하게 비판하는 논조보다는 현 90년대 생의 특성들을 경영자적 관점으로 분석한 책이다. 최근에 나온 또 다른 책은 이철승이 쓴 ‘불평등의 세대’이다. 저자는 민주화 세대로 불리는 ‘386’ 세대를 양적 연구방법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무엇인지 분석한다. 반면에, 기성세대의 입장으로 20대를 비판한 글 또한 있는데 ‘파리의 택시 운전자’,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쓴 작가로 알려진 홍세화의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이라는 칼럼도 당시의 20대들을 비판한 글이다. 골자는 이렇다. 요즘 20대들은 고전 철학도 모르고 주입식 교육, 줄 세우기 식 경쟁 속에서 대학 서열만 중요시하는 존재다. ‘물질적 가치를 우선시하면서 대중문화 속 진실된 정보도 구분하지 못하고 대학에는 놀러 갔다’는 것.
이후 06, 08년 때의 가장 높은 한나라당의 여론조사 지지율, 이명박 정부 광우병 시위 때의 정치 상황의 원인은 20대들의 정치적 무관심이라며 20대들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더해서, '나는 꼼수다' 프로의 패널이자 국회의원 출마 경력도 있던 진보 성향의 김용민 교수가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라는 기고문으로 ‘20대 개새끼론’이 이슈화되었다. 현재 20·30대 투표율이 과거에 비해 많이 증가해서 이 주장은 사그라든 지 꽤 되었지만 2000년대 후반까지도 세대 간 갈등은 계속해서 다루어지고 있었다. 2020년 현재의 세대 갈등 문제는 ‘정년연장’과 같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논의가 존재함과 동시에 조직 문화 안의 권위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꼰대’ 상급자와 신입의 갈등 구조도 흔치 않게 나타난다. 앞선 사례들은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세대론’적인 관점에서 논의되었다. 세대 간 논의는 사회·경제·정치적 상황이 상이함을 전제로 다른 세대 간의 비판을 주로 다룬다. 88만 원 세대, 20대 개새끼론, 386세대 책임론 등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필자의 연구는 세대론적인 관점으로 세대 갈등을 풀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음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진행하려 한다. 세대 갈등 해결의 시작은 ‘세대론에서 벗어나기’이다. 필자는 한국의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노동 계급의 관점으로 역사를 분석한다. 필자가 세대론을 비판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역사를 분석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로 세대론에서 논의되는 ‘386’ 세대는 당시의 대표성을 가지지 못한다. 민주화 운동 세대의 주체로 여겨지는 세대는 당시에 고학력 엘리트 계층이었으며 그 수도 노동자들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단지 군사정권 속에서 민주화의 상징성이 부각되었기에 현대에 와서 대표성을 띄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둘째로 젠더적인 관점에서 세대론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역할은 경시되었다. 70년대의 한국 노동운동의 초석은 여성들이 닦았고 뒤 세대의 노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나 세대론에서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셋째로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세대론은 건강한 논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세대론은 갈등에 대한 현상 분석은 제시할 수 있으나 상이한 세대끼리의 연대의식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의 세대 갈등은 자원의 분배와 같은 경제적 문제들이 주가 된다. 세대론보다는 계급·계층별로 현 상황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더해서, 어떤 세대건 타협하는 지점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데 세대론 적인 관점에서는 현세대가 이전 세대에게 책임을 묻는 구조로 갈 경향이 높다. 필자는 1편 에서에서 해방 후 산업화 체제에서의 노동자들의 등장과 삶을 다루고 2편에서는 한국 노동계급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 운동에서의 역할을 살펴볼 것이며 3편에서는 민주화, 노동탄압 과정에서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연대를 살펴본다. 결론에서는 세대론적인 관점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도적·사회적 측면에서의 노력을 모색해 봐야 할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를 평가할 때면 늘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군사 정권 속 경제 성장 이야기다. 산업화 시대의 급격한 경제성장은 현재까지도 보수정당 지지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그 세대를 살아온 중·장년 세대들은 경제 성장의 과정을 삶으로 겪었다. 그러나 경제 성장의 몫은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과 엘리트 출신, 기업가 출신의 성공 스토리로 만들어졌다. 위로부터의 관점으로 쓰인 역사 서술이 대부분이었고 ‘산업 역군’으로 칭해졌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들은 교과서에 아주 짧은 서술로 남아있었다.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 역시 비슷했다. EBS 위주의 입시 교과서엔 당시 노동계급이나 농민들의 삶이 아닌 거시적인 관점의 서술이 주가 되었다. 가령, ‘70년대엔 경공업이, 80년대엔 중화학 공업이 발전했고 이는 국가 주도하의 수출주도형 산업 정책으로 이루어졌다.’와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중·고등 교육과정이고 입시에서 중요한 것들 위주로 배운다는 게 정설이 된 시대라지만 아래로부터의 역사, 여성이 주체가 되는 역사는 거의 볼 수 없었다. 필자는 거시적·엘리트주의적 요소가 남아 있는 교육의 역사는 20대·30대들이 ‘세대론’ 적인 관점에 쉽게 의문을 갖지 못하게 만든다고 본다. 필자 역시 대학에 와서 한국 근현대사 속 여성과 노동자들의 역할을 공부하기 전까지는 산업화 세대는 ‘노력하기만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던 세대’라는 말에 공감했었다. ‘중산층 유토피아’는 실존했다고 말이다. 필자는 그러한 명제에 대한 반론으로 본론 2의 미시적·계급적 관점의 역사를 돌아보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1. 산업화의 시작
산업화 시대에 농촌에서 도시로 많은 이동을 했던 여성들은 공장 노동자로 칭해지는 ‘공순이’들만 있지는 않았다. 1920년대부터 광복 후 60년대 초까지 가사노동을 전문적으로 했던 ‘식모’들이나 버스 안내양과 같은 노동자들도 많이 존재했다. 60년대에 되어서야 경공업 위주의 공장들이 세워졌고 저임금 노동력이 주가 되었던 공장들은 많은 상경 여성들을 공장으로 불러들였다. 상경한 여성들은 식모살이를 공장 노동자를 거쳐 가는 단계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조금이나마 급여가 더 많은 공장으로 들어간다. ‘식모’의 존재는 이렇게 점점 사라졌고 ‘공순이’라 불리는 여성 공장 노동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분명 ‘식모’의 역사도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면이고 기억해야 할 역사이지만 필자는 조금 더 현 ‘세대 갈등’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세대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식모’ 이후 ‘공순이’들의 삶을 살펴본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은 박정희 정권하에 ‘근대화’를 내세운 산업화가 이루어진다. 전후 한국은 천연자원도 없었고 영토도 넓지 않았으며 기술력도 없었다. 내수시장은 빈약했고 해외 투자에 의존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제품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싼 가격이 필수적이었다. 제품 가격은 임금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기계보단 사람들의 손이 많이 가는 식품, 섬유, 신발 등의 경공업이 대표적인 예다. 박정희 정권은 도시 임금노동자들의 식량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저곡가 정책을 유지했다. 도시 발전은 농업부문의 희생이 뒷받침되었던 것이었고 농촌지역으로 돌아가지 않는 노동자들의 이동을 낳음으로써 도시로의 노동력 이동을 가속화했다. 산업체들은 전라도와 동부지역은 제외한 수도권과 부산을 연결하는 축에 형성되어 있었다. 주된 이농인구의 연령층은 젊은 층이었고 농사일은 점점 노인들의 몫이 되어 여성들의 농업 노동 비율 역시 증가했다. 1965~85년 사이의 여성의 농업 노동참가율은 38퍼센트에서 45퍼센트로 증가한다. 즉, 여성 노동력은 도시지역의 산업수요 충족과 농촌에서의 농사일 모두를 충족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초기 산업화 경제 성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역할은 기대 이상으로 컸다.
정리하자면, 첫째로 한국의 산업화는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대규모의 이농 현상을 수반했다. 도시로 온 이들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었다. 둘째로는 산업 조직의 도시 집중현상이다. 도시 내에서도 산업지역과 공업지역에 집중되었다. 이 산업체들은 소규모 가족경영과 같은 기업이 아닌 대규모의 기업체였다. 이러한 공간적·환경적 조건들은 후에 노동자들의 네트워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마지막으로는 도시로 온 노동자들의 ‘동질성’이 굉장히 높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사회적 배경, 기술 수준 등은 비슷했다. 가난한 농촌 가정 출신이라는 배경이 주를 이루었는데 경공업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가 더욱 그런 경향을 보였다. 이런 특징들은 산업화 시절 한국 노동자들이 사회 갈등 속에서 주체가 되는 구조적인 조건을 제공했다. 필자는 다음 장에서 이러한 구조적인 배경 속에서 ‘공순이’리고 불렸었던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 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2. 우리에겐 익숙지 않은 공순이들의 삶
- 너무도 열악헀던 그들의 삶
악화되어가는 농촌의 현실 속에서 잉여 노동력이 되었던 여성들은 도시로 상경한다. 도시에 대한 동경, 자아 발전이라는 명목 속에서 갔던 여성들도 있지만 가계경제에 보탬이 되고자 올라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공장은 당시에 나름 이상적인 일자리로 여겨지기도 했다. 가게 점원, 식모살이보다 임금이 높았으며 기술을 습득해서 돈을 더 벌 수도 있었다. 잠을 잘 수 있는 기숙사도 존재했고 대기업의 직원이라는 의식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67년 4월 1일 구로동 내의 수출산업 공업단지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허허벌판을 불도저로 밀어붙인다고 수출 공장이 되겠냐며 의심한 사람도 많았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다. 정부는 이 단지를 25개 공장이 더 들어설 수 있도록 확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77년에 시작한 ‘새 마음 운동’은 여공들에게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강요한다. 충·효·예를 강조하는 정신개조 작업이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는 이 운동의 담당자였다. 다음은 79년 박근혜가 낸 《새 마음 길》이라는 소책자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계급 정체성이 아닌 국가의 일원이라는 강조하는 글들이 쓰여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은 당시 여공들이 ‘산업 역군’의 정체성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과 YH무역 투쟁은 이데올로기 작업이 허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YH 무역은 가발 산업체였고 대표적인 여성노동자의 노동력이 들어간 경공업 수출 기업이었다. 당시 작업방식은 생산량만큼 수익을 낼 수 있는 도급제였고 회사의 생산량 독촉은 경쟁을 심화시켰다. 또한, 단가 후려치기로 임금을 낮추기도 했는데 이는 섬유산업도 마찬가지였다. 여성 노동자들의 잔업과 철야는 일상과도 같았다. 지금도 유명한 프로스펙스의 수출 제조업체였던 ‘국제상사’의 노동조건은 이렇다. 아침 7시 50분부터 저녁 6시 30분은 형식상의 시간이고 ‘책임 작업량’이라는 목표 작업량에 달성하지 못하면 조기출근과 연장근무는 필수였다. 철야는 일주일에 최소 두 번에서 최대 5번이었고 관리자들의 폭언은 일상적이었다. 몸이 아프거나 결근을 하면 사무실에서 폭행과 구타, 폭언 등을 당했다. 현재까지도 대중들에게 익숙한 신발이나 섬유산업의 초창기는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여공들의 삶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대기업 여공들의 경우 대부분은 기숙사 생활을 했다. 기숙사는 근무자의 80퍼센트 이상을 수용했고 방과 세면실 외에도 독서실, 다리미실, 목욕탕과 휴게실도 갖추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대기업의 직원이라는 의식은 이러한 인프라에 기반하기도 했다. 기본적인 생활도구들이 구비되어있었고 화장실도 수세식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깨끗한 위생 환경이었다. 비용 측면에서도 자취방을 구하거나 하숙집에 사는 것보다 저렴했기에 여공들은 기숙사 생활을 선호했다. 신입 여공이 들어오면 선배들은 환영회를 열어주고 생활규칙들에 대해서 알려주기도 했다. 관리자들은 인력 관리 측면에서 노동자들을 한 공간에 모아두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했다. 여공들에게 기숙사는 휴식 공간만이 아니라 노동조합 활동을 은밀하게 모의하는 곳으로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YH무역의 경우 기숙사비가 월급의 3분의 2를 차지했으며 원풍모방 기숙사는 선풍기도 없었다. 한 명이 차지할 수 있는 생활공간은 굉장히 적었고 여럿이서 생활해야 했기에 사생활은 가질 수 없었다. 교대 근무로 인해 계속해서 사람들이 드나들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에 수면의 질은 떨어졌다. 여공들이 가장 불편해했던 점은 외출의 자유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보통 일주일에 1~3회 외출만 허락했으며 외박은 1번 정도만 가능했다. 복귀 시간은 8~9시였고 기숙사의 사감은 이들의 시간을 철저히 감시했다. 사측은 탈선과 범죄 예방 등의 명분으로 이런 통제를 했지만 실상은 생산라인에 원활하게 노동력을 투입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기업의 부설학교가 있는 경우엔 여공들은 틈틈이 공부했다. 독서나, 자수와 같은 취미중심의 소모임 공동체도 형성되었는데 이는 노동조합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기숙사가 없는 곳에서는 공장 인근 주택을 통째로 빌려서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설은 열악했고 연탄가스 중독이나 감금, 폭행, 보일러 폭발이나 화재가 일어나는 경우도 빈번했다. 다음 장에서 구로공단의 ‘벌집’을 살펴보자.
구로공단의 경우 노동집약적 산업 발달로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급격한 여공들을 수용할 인프라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는 공장 주택가에 ‘벌집’이라 불리는 주거형태가 생긴 원인이었다. 주로 가리봉동에 제일 많았는데 전체 벌집 중의 64퍼센트나 되었다. 벌집은 2~3층 높이, 50~100평 정도의 양옥 주택 형태인데 대문을 열면 지하부터 지상까지 각층마다 통로를 따라서 10개의 좁은 방이 벌집처럼 붙어있는 형태다. 한 방의 세입자는 대개 6명 이상이었고 수출 공단은 주로 3교대 근무였다. 구로공단의 여공들은 2명이 일하고 4명이 쉬는 방식으로 살아갔다. 방세가 너무 높았기에 여러 명이 함께 살 수밖에 없었다.
닭장과도 같은 모습을 띄었고 두세 칸 건너 방의 TV 소리도 잘 들릴 정도로 기본적인 방음과 같은 조건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또한, 무허가로 개조한 집이었기 때문에 겨울철에 연탄가스 사고도 잦았다. 벌집 내에서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던 여공들의 공동생활에서 서로가 서로를 챙겨주는 낭만은 존재하기 힘들었다. 옆방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을뿐더러 교대근무 때문에 다 같이 모일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강한 노동 강도는 벌집을 그저 몸을 뉘이는 ‘숙소’의 기능으로만 만들었다. 현재 이 자리는 한국의 IT 산업 단지로 변했지만 불과 몇십 년 전까지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했던 여공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경제 대국으로 발전한 한국의 현대사를 돌아보면 우리 세대가 알지 못하는 잊힌 아픈 역사들이 많다.
2편에서는 이런 고통의 역사뿐이 아니라 어떻게 부조리와 싸워왔는지와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