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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누 Sep 20. 2020

정말 ‘그’ 세대가 그랬어? (하)

-세대론에서 벗어나기  (하)

1편에서는 공순이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알아봤습니다. 2편에서는 그들의 아프기만 했던 역사에서 어떻게 한국에서 노동계급이 형성되고 투쟁했는지를 알아봅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역할이 주도적이었음은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는 역사입니다. 굵직했던 그 시절 투쟁의 기억들을 통해서 세대론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1. YH무역 사건



그렇다면 공순이들의 역사는 이렇게 고통의 역사만 존재했을까. 그렇지 않다. YH무역의 이야기는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보여준다. YH무역은 1966년 10명의 사원으로 출발했지만 가발 수출의 호황과 정부의 지원 아래 창립 4년 만에 3000명의 직원을 둔 국내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했다. 물론 그 과정 속엔 저임금과 부당노동행위, 외화 밀반출 등의 불법이 만연했다. 창업자인 장용호는 가발공장을 처남에게 맡기고 다른 무역 회사를 설립한다. 처남은 해운회사 구입을 위해 회사의 이윤을 빼돌리고 뒤를 이은 세 번째 경영자 역시 다른 회사를 사기 위해 돈을 빼돌렸다. 70년대 이후 세계적인 가발시장 쇠퇴로 인해 회사의 재정은 고갈되었고 고용자수도 절반이 넘게 줄었다. 그리하여 79년 3월 경영진은 공장 폐쇄를 계획한다. 75년 자주노조로 출범했던 YH 무역노조는 이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투쟁을 시작했다. 경영진들의 자산은 이미 모두 미국으로 빼돌린 상황이었고 여공들은 임금도 못 받고 공장에서 나가야 할 신세가 되었다. 회사는 퇴직금과 해고 수당 미수령 시 법원에 공탁하겠다는  말만을 일방적으로 남겼다. 여공 186명은 이런 상황을 외부에 알리려는 시도를 하고자 마포구에 있던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간다. 한국 역사 최초로 여성 노동자들이 정당 당사를 점거했던 것이다. 당시 신민당 총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 조선총독부를 철거 한 역사로 익히 알려져 있는 김영삼이었다. 박정희 정권과 대립하는 위치에 있던 그는 신민당사를 찾아준 노조들을 지지했다. 

▲신민당사에서 노동자들이 강제 해산당하고 있는 모습. 경향신문 2017.01.20. “'YH 무역 사건' 주도 여성 노동자들, 재시면서 모두 무죄” 기사.

이 사건은 그리하여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대다수의 언론이 이 사건을 다루었고 신민당은 공권력 철수, 노사 중재를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8월 11일 새벽 2시에 ‘101’ 작전으로 알려진 경찰의 무력행동이 시작됐다. 2000명의 경찰병력은 당사를 점거한 노동자들을 순식간에 강제 연행했고 신민당 의원과 당직자, 기자들도 무차별로 폭행을 당한다. 이런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죽고 김영삼은 저택에 감금당한다. 박정희 정권의 이런 야당 인사 탄압은 이미 김영삼 이전 김대중에게 행해졌던 것이었고 이후 김영삼은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노골적인 정권의 탄압은 부마 민주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여공들의 투쟁은 인간다운 권리, 일터를 지키려는 투쟁에서 시작했지만 그 끝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바꿨다. 이 사건은 노동운 동보다 정치 영역에서의 영향을 더 많이 미쳤다. 이 사건이 있기 전 제도권 정당들은 노동운동에 있어서 다소 방관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신민당이 의도치 않게 노동운동과 연루되면서 정치·사회적인 갈등의 폭발이 일어났다. 이후 학생들이 주도한 부마항쟁에 대한 정권의 대응 과정에서 10.26 사태가 벌어졌고 한국의 80년대는 또 한 번 격동의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2. 노동자와 학생들의 연대

-대우자동차 파업과 구로 연대파업


     

 이번엔 세대 갈등에서 기성세대의 ‘대표’로 구분되는 ‘386세대’를 중심으로 한국 현대사를 돌아본다. 그들의 역사가 소위 세대론을 논의할 때 등장하는 ‘꿀 빨던 세대’가 맞는지 경제 호황기였기 때문에 누구나 계층상승을 할 수 있었다는 한국의 황금기를 겪었는지 말이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들은 어떤 관점으로 과거를 돌아보느냐에 따라 맞는 점이 어느 정도 있을 수도 있고 완전히 틀릴 수도 있다고 본다. 본 연구는 계급적 관점에서 아래로부터의 역사로 현대사를 파악하는데 이런 관점에서라면 세대론에서의 ‘기성세대’에 대한 평가는 틀렸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근거로 80년대 노동자들과 학생들 간의 연대를 살펴보자. 



박정희 사후 1980년 봄에 노동쟁의가 폭발적으로 치솟는다. 1979년 105건에서 1980년 407건으로 급격히 증가했는데 대부분의 쟁의는 임금체불· 인상, 해고 등과 같은 경제적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을 대표로 한 신군부 세력의 등장은 또다시 정치활동을 억제한다. 시민사회 무력화와 동시에 노동탄압이 시작되었다. 시위 주동자나 노조활동가를 폭력배들과 함께 삼청교육대로 보냈고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의 존재 때문에 재취업이 불가능했다. 고용주들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노조운동에 가담한 수 천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기에 이른다. 노동조합은 1980년 5월 6011개에서 그해 말에 2618개로 대폭 줄었고 조합원 수도 112만 명에서 95만 명으로 줄었다. 국가의 통제 아래 취업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노동운동가의 길이 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두환 정부의 강경한 탄압은 오히려 노조 활동가들을 양성했다.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도 존재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노동투쟁을 반정부 민주화운동의 전략으로 인식했다. ‘노동 현장론’은 이런 전략의 기반이었다. 학생들은 공장 노동자로 위장취업을 했으며 공장 안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필자의 세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현재 야당 보수주의 계열 인사 중 ‘김문수’는 당시 노동운동계의 전설과 같은 인물로 회자된다. 그 역시 진작에 공장 노동자가 되어 노조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즉, 학생들은 산업 노동자들이 강력한 잠재적 사회변혁 세력이며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맹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노학연대(勞學連帶)라고 불리는 변혁의 시작이었다.

▲파업농성 당시의 사진 이수현, 2005,06,27 “다시 읽는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 매일 노동뉴스


1980년대 초부터 대학을 중퇴하거나 반정부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제적당했던 학생들은 공장으로 계속 들어간다. 당시 절반 정도는 여학생들이었다. 노학연대 투쟁은 크게 ‘소그룹 운동’ 노선과 ‘지역 노동 운동론’등의 노선으로 나뉘었다. 전자는 일반 노동자들의 기초적인 계급 역량의 토대를 강조했고 후자는 좀 더 정치 지향적이고 실질적인 투쟁의 중요성에 초점을 두었다. 물론 두 노선은 서로 혼합된 형태로 나타났기에 차이가 크다고 볼 수는 없다. 투쟁의 형태는 대우자동차와 구로공단의 형태가 대표적이다. 당시 수많은 연대투쟁이 존재했지만 필자는 두 사례를 돌아볼 것이다. 대우자동차 투쟁은 학생 출신 노동자들 송경평과 이용선에 의해 조직되고 주도된다. 2년 동안의 상여금 미지급, 잔업·공휴일 수당의 미지급 때문에 노동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당시 존재했던 노조는 조합비만 거두고 일은 하지 않는 어용노조에 가까웠다. 회사는 송경평과 이용선이 학생 출신 노동자라는 것을 알아내 사무직으로 전출 발령을 보냈고 그 둘은 회사의 결정에 반대하다가 해고된다.



이후 노동자들은 어용에 가까운 노조를 노동자를 대표하는 노조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특별위원회를 설치한다. 85년 임금협상 시기가 돌아왔을 때 노조는 생산성 증가에 따른 임금인상, 공정한 이윤분배를 요구했는데 협상은 수 일간 진행됐고 농성·시위 후에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하게 된다. 파업 4일째엔 약 350명의 노동자들이 회사 3층에 무력으로 진입해 철야시위를 시작한다. 재벌기업의 파업은 정치적 문제로 변했고 정부는 대우에게 해결을 위한 압력을 넣게 된다. 이후 대우그룹 총수 김우중이 협상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한다. 파업 노동자 대표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다 중퇴해 노동자로 들어온 학생 출신의 홍영표였다. 이틀 동안 회의 후에 두 사람은 10퍼센트의 기본급 인상, 4퍼센트의 수당 신설 및 사원아파트 건설 등의 직원 복지를 포함한 합의안에 동의한다. 대우자동차 파업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두 가지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데 첫 째는 재벌기업에서 일어난 파업이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남성 중심이었던 중공업 부문에서 일어난 최초의 조직적인 파업이었다는 것이다.



구로 연대 파업은 구로공단에 위치한 대우어패럴 노조 지도자들 세 명이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특별한 노동분규가 없었음에도 두 달 전에 있던 임금협상 기간 동안 단체행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것이었다. 이 구속 소식은 구로지역의 많은 노조 지도자들과 학생 출신 노동자들의 분노를 샀고 결국 노조 대표들의 파업으로 이어졌다.     당시 구로공단 공장 노조들을 비롯한 대우어패럴 노조는 소수의 노동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만들어졌던 역사기 있다. 구속된 김준용은 그 핵심인물이었기에 체포 소식이 가져온 파장은 컸다. 대우어패럴 공장에 출근한 노동자들은 김준용의 구속 소식을 듣고 분노했고 재봉틀과 두루마리 천으로 공장 2층을 봉쇄했다. 그들은 “노동 3권 보장하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와 같은 정치적인 문구를 새긴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그날 오후 2시에 효성물산 공장이 있는 반대편 건물에서도 징과 꽹과리 소리로 파업을 시작했다. 가리봉전자의 구로·독산 공장, 선일 섬유의 노동자들도 연대파업에 들어갔고 이틀 후인 24일 오후 4시까지 4개 기업의 약 1300명의 노동자들이 연대파업에 참여하는 역사를 썼다. 



구로 연대 투쟁은 인근 지역의 여러 기업체의 노동자들이 참여를 이끌어낸 연대투쟁의 성격을 가졌으며 결과적으로는 노동자·학생·반정부 집단들 사이의 연대를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학생들은 연대파업에 첫날부터 가담했고 기독교와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단체들도 구로 연대파업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파업은 실패로 끝난다. 6월 29일, 회사가 고용한 용역들이 각목과 쇠파이프로 단식농성 상태에 있던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경찰은 공장 건물을 에워싸고 방관했고 탈진상태에 있던 노동자·학생들은 저항할 수 없었다. 파업이 실패로 끝나서 안타까운 역사로 남았을까? 그렇지 않다. 역사 속에서 약자들의 저항은 수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후대의 투쟁의 동력으로 남는다. 대우자동차와 구로 연대파업의 투쟁 결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로는 학생·노동자들에게 패배의 집단적 경험은 기업 간 노동자들의 상호 연대와 정치의식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노동 활동가들에게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기존보다 광범위한 정치 지향 조직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후 한국의 학생과 노동자의 연대는 87년 이후까지 계속 이어진다. 87년 6.29 선언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행동한 결과였지만 그런 배경에는 노동운동 세력의 잠재력이 분명 존재했다. 다음 장에서는 결론 부분으로써 한국 산업화 시대의 기억을 가진 세대와 신자유주의 체제가 일상적이었던 필자의 세대의 화해를 도모해보려 한다.




3. 네가 생각하는 그 세대들은 어디 있어?



‘386세대 책임론’은 틀렸다.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어머니 세대들은 공순이라 불리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삶을 살아왔다. 아버지 세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화세대’의 책임론은 현재까지도 많은 왜곡을 낳았다. 필자 또래들이 주장하는 논리대로라면 그 시절에 호황을 누렸던 세대가 현재까지도 사회·경제적 자산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물론 부의 상속을 받아 기업을 경영하고 상대적으로 취업이 쉬울 때에 대기업에 들어가 중산층 이상의 삶을 유지하는 기성세대들도 존재한다. 고시와 같은 시험을 통해 지식권력 엘리트가 된 기성세대도 있을 것이고 의회정치에 진출해 미디어에서 목소리를 내는 기성세대 역시 많이 보인다. 그러나 필자의 세대는 ‘눈에 보이는 기성세대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세대론과 같은 담론을 형성하는 것은 주로 언론과 지식 엘리트다. 특히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메이저 언론 ‘조선일보’의 2000~2017년 입사 기자 두 명 중 한 명은 서울대학교 출신이다. 뒤를 이어 연세대, 고려대 순이었고 이는 거대담론을 생산하고 공론장으로 가져오는 역할에 언론 엘리트들의 역할을 배제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론에서 언급했던 세대론과 관련한 책을 쓴 사람들의 약력도 학력 엘리트 출신이 대부분이며 한국에서 소외계층에 있는 기성세대들과 거리가 먼 사람들의 이야기다. 계급적 관점으로 세대 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386세대 속에서도 현재와 비슷하게 안락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이야기다. 80년대의 대학 진학률은 평균 30퍼센트 대에 불과했고 ‘운동권’들은 제적과 중퇴로 졸업하지 못한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대학을 졸업해 좋은 직장에 갔던 사람들은 예상보다 더 적다. 386세 대론의 대표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 386세대 엘리트들이 사회와 정치 각계각층에 많아 보이는 이유는 절대적 인구수와도 관련이 있다. 2000년대 생은 482만 명에 불과한 반면에 386세대는 860만 명으로 전 세대 중 가장 거대한 규모다. 세대 간 인구수 차이 때문에 구조적으로 영향력이 가장 클 수밖에 없는 점은 20대들이 세대론적 논리에 쉽게 빠져드는 요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세대 문제 환원론은 ‘가상 시나리오’에 가깝다. 기성세대의 청년 문화는 분명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됐지만 그들은 노동자들과 연대를 통해 국가 탄압에 저항해야 했다. 그보다도 더했던 것은 당시 저학력 빈곤 계급 노동자들이었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가족주의와 계층상승의 희망을 가지고 버텼다. 그러나 이런 집단적 기억을 가진 세대 대부분이 ‘현재 기득권이 되어 청년세대와 갈등한다는 주체가 됐다.’는 논리는 비약이 많다. 무엇보다도 세대론적 관점은 계급 문제를 가려버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세대론 환원주의는 현 한국의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해결방안으로써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 같은 정책적인 부문 역시 노동시장 내에서 정규직·비정규직, 산업부문, 공기업·사기업 등의 요소를 고려하는 것이 첫 번째다. 단순히 ‘정년’에만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20대들의 삶 역시 비슷하다. 신자유주의 속 경쟁체제에 익숙한 20대들은 ‘차별’에 익숙하다. 줄 세우기 방식의 입시체제로 20살이 되면 ‘학벌’이라는 지표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대학 진학률이 70퍼센트에 육박한 지금 대학을 간 사실보다는 ‘어떤 대학’을 갔냐가 중요해졌다. 즉, 20대들 역시 한 세대로 뭉치기보다 과도한 경쟁으로 차별을 일상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것. 사회학자 오찬호가 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가 20대들의 차별 정당화를 주제로 베스트셀러 코너에 자리 잡은 이유는 분명히 있지 않을까. 또한, 2017년에 등장한 ‘수저 계급 담론’은 부모님들의 사회·경제적 자산에 따라 자식들의 출발선도 정해져 있다는 ‘부익부 빈익빈’의 논리를 담고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한 20대들의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한탄은 결국 계급과 분배 문제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더해서, 386세대처럼 독재에 대한 집단적 경험 의식이 부재한 현 20대는 공통된 ‘젊은 세대’로 묶이기엔 너무 파편화되어있다. 필자는 이 연구를 통해 ‘세대 문제’를 해결하려면 세대 문제를 세대적 문제로만 보는 관점에 벗어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첫 번째로 교육과정에서의 개정이 필요할 것이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한국 현대사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필자의 고등학교 때처럼 4.19 혁명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의 순서를 외우는 식이 아니어야 하고 한국의 노동 운동사를 전태일 열사의 비극적인 죽음 한 줄로 다루는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젠더적인 관점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의 역할이 훨씬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한다. 단순히 그 시절 ‘산업 역군’의 역사로 취급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서 한국사 수업 시수를 늘리는 식의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둘째로는 언론권력과 정치권력에서 세대 간 경제적 자원 배분의 문제를 ‘세대 문제로만 환원’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프레임은 일정 부분 근거가 있긴 하지만 논리의 비약이 있는 부분도 다수 존재한다. 특히, 미디어를 일상적으로 다루고 미디어 공론장에 익숙한 20,30대들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두 번째 해결책에 연장선상인데 시민사회와 학내 자치의 측면이다. 유튜브와 페이스북이 지배하는 인터넷 담론 생산의 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문해력’이라는 기초공사가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 시민단체와 사회단체는 자주 미디어에서 언급되는 갈등 문제에 대한 토론회를 정기적으로 열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논객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학내에서는 소규모로라도 책모임 공동체의 활성화를 만드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는 공동체의 문해력을 기르는 것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가짜 뉴스를 판별하고 자극적인 미디어들에 대한 방어수단이 될 것이다. 그 세대의 탓으로 모든 것을 돌리려는 시도는 분명 사회현상을 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그러나 현실 문제 해결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필자는 세대론에 혹해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그 세대가 그랬을까요?”



2020. 09. 20

올해 봄에 쓴 글입니다. 발행하려고 다시 읽어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네요. 그래도 올봄에 이 글을 쓸 때에는 노동운동사를 공부한다는 느낌으로 열심히 썼던 기억이 납니다. 누군가는 투쟁의 역사를 세대와 연관 지으려는 시도가 비약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세대라는 같은 시대적 배경을 공유한 집단을 이야기할 때 담론을 주도하는 엘리트들이 아닌, 주위에 늘 있지만 잊히고 사라져 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둘을 엮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에서 '노동'이란 어떻게 생각되고 있는지 고민이 많습니다. 물류창고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기에 택배 기사들의 파업이 정당한 요구라는 것을 느낍니다. 30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물건을 옮기고 분류하면 땀이 비오듯 쏟아져 유니폼이 다 젖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15톤 트럭이 들어와 물건을 하차하는 순간이 두려웠습니다. '저걸 언제 다 분류하나. 나와 같은 아르바이트생과 직원 둘이서 저걸 다한다니..'라고 생각했던 그때가 벌써 5년전이지만 여전히 물류창고는 폭염, 화재와 같이 생명과 직결되는 것들 앞에서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갈길이 많아 보이는 한국의 노동이네요. 부족하지만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글의 양적 지표들은 논문과 신문 기사 등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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