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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누 Sep 15. 2022

도망치고 싶은 꿈으로부터

기묘한 이야기 시즌 4 감상 노트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시즌4를 보고 끄적여댄 감상 노트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5점만점이라면 4.5점





악몽인걸 알아서 너무 깨고 싶을 때가 있다. 꿈인 줄 알지만 꿈이 무서워서 꿈에서도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더 빨리 깰 것 같아서. 그런 꿈을 꾸고 아침에 눈을 뜨면 괜히 더 피곤한 데다가 하루의 시작이 무겁다. 기묘한 이야기에서 빌런의 타깃이 된 맥스 역시 과거의 트라우마가 재생되는 꿈속에서 고통받는다. 꿈인걸 알지만 도망치지 못하는 그 상황이 매회 나오는데 꽤나 고통스럽게 몰입해야 했다.


기묘한 이야기 시즌 4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가진 아이들을 대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빌런 '베크나'가 나온다. 전 시즌에도 지능을 가진 괴생명체가 빌런으로 등장했지만 이번 빌런은 그냥 인격이 있는 존재다. 마치 마블의 타노스와 같이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행동한다. 약육강식의 논리와 현실세계에서의 복수심이 짬뽕되어 뒤집힌 세계를 현실세계로 불러오려는 것 같은 진부한 논리같긴 하지만.


기묘한 이야기는 호킨스라는 마을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그 현상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린다. 인상 깊었던 점은 이야기를 해결하는 주체들은 10대다. 어른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초능력을 가진 우리 히어로 '엘'이 초등학생에서 시즌 4를 맞아 고등학생이 되기 때문에 메인은 아이들이다. 초자연적인 현상은 같은 공간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뒤집힌 세계' 세계관에서 시작한다. 80년대 냉전시기가 배경이기에 염력을 이용한 인간병기의 개발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주인공 '엘'이 등장한다. 탱크까지 날려버리고 다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엘은 뒤집힌 세계의 문을 열 수 있는 능력까지 가졌다. 그리고 호킨스는 뒤집힌 세계의 틈이 존재하는 시골 마을이고. 이 틈을 통해 괴생명체들이 현실세계로 넘어오고 이를 엘과 마이크, 루카스, 더스틴이라는 괴짜 기질이 있는 너드(?)들이 해결한다.




1. 신선한 세계관


기묘한 이야기를 추천받았을 때 1화를 볼 때까진 왜 이게 인기 드라마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SF인지 호러인지 스릴러인지 잘 모르겠으나 엘이 연구소에서 도망친 초능력자라는 설정만 보면 그냥 엑스맨류의 초능력자 이야기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집힌 세계라는 설정은 굉장히 매력 있었다. 내가 사는 이 집에 사실은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세계엔 인간의 손이 하나도 닿지 않은 공간이 있고 새로운 행성과 같다면. 평행우주는 다른 우주의 비슷한 지구와 나의 존재가 있을 확률이 높겠지만 뒤집힌 세계는 아예 다른 행성의 느낌이다. 틈을 열면 현실과 이어지고 그곳엔 태양이 존재하지 않는 마치 '연옥(煉獄)'과 같은 세계 펼쳐진다. 이 뒤집힌 세계의 묘사가 너무 좋았다. 흰색 재들이 대기에 떠다니고 빛이 하나도 없는 세계. 당장이라도 괴생명체가 주위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공간. 뒤집힌 세계에서도 현실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설정. 특히 시즌 4는 최고봉이었다. 몽환적인 배경을 굉장히 좋아하기에 용암이 끓어오르는 대지도 아니고 눈보라가 치는 얼음왕국도 아닌 붉은 번개가 치고, 황색 하늘을 띄는.. 장엄함과 공포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그런 광경이 좋았다. 네 시즌을 보면서 뒤집힌 세계가 묘사되는 장면들은 늘 경이로웠다. CG의 한계는 어디까진지 게임보다도 더 게임 같았던 배경들이었다.




2.  I 스러운 아이들


MBTI를 나름 괜찮은 분석틀로 생각하고 있는 나로선 인물들의 I스러움이 좋았다. 전형적인 소년 만화스러움의 쾌활함, 낙관적, 외향성을 띈 캐릭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알짜배기 조연 역할에 과감하고 외향적인 역할을 하는 낸시나 스티브가 있었기에 캐릭터 간의 밸런스가 잘 맞지 않았나 싶다. 엘과 연인관계임에도 초인적인 힘을 가진 엘에게 자신이 쓸모없어지면 어떻게 될지 고민하는 마이크, 괴짜 무리들에 섞였다고 놀림을 받는 게 지쳐서 잘 나가는 무리에 들어가고 싶어 했던 루카스, 엘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해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엘을 위로하는 정도밖에 하지 못한 윌의 모습 모두가 이해가 갔다. 나 역시 I적 기질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잘 나가는 농구부 주장보다야 던전 앤 드래건을 진심으로 즐기는 아이들이 더 좋았다. 


그럼에도 이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느껴진 것은 호킨스를 지킬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진지했고 용감했기 때문이다. 매 시즌 왜 10대 청소년들이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진 이 세계의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것인지 의문이 들다가도 엘과 겪은 수많은 위험들을 생각하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호킨스의 위험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란 걸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다. 엘의 존재를 믿고 의지하는 몇 안 되는 어른들 (조이스, 호퍼)을 제외하면 그들에게 어른들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다. 게다가 이미 시즌 4까지 이 세계의 생물들과 하이파이브를 여러 번 했는데 뒤틀린 세계니, 마인드 플레이어니, 데모고르곤이니 하는 방대한 이야기가 경찰들에겐 애들 장난으로 느껴지지 않겠는가. 


화려한 싸움실력, 다양한 무기 사용 능력은 경관이었던 호퍼가 도맡고 주인공들은 과학 서클 출신들 답게 모르는 세계에 대한 가설을 세운 뒤 실행에 옮겼는데 그 과정이 아주 흥미진진하다. 특히 첫인상이 가장 어벙해 보였던 더스틴은 굉장한 논리 왕에 통찰력까지 겸비한 브레인 그 자체다. 첫인상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려준 셈. 반전 매력이 있는 캐릭터였다. 호불호가 갈릴지 모르는 중간중간 로맨스 라인은 내일 당장 괴물에게 사지가 부러져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전개다. 극한의 상황에서는 누구나 말해두지 못한 진심을 전하기 마련이니까.



3. 사랑의 힘으로 악을 물리치리라


I love you on good days.

좋은 날에도 사랑하고

I love you on bad days.

힘든 날에도 사랑해

I love you with your powers, without your powers

초능력이 있어도, 없어도 널 사랑해

I love you for exactly who you are

있는 그대로의 널 사랑해

you are my superhero

넌 나의 슈퍼히어로야.



눈물을 흘리며  엘에게 사랑한다고 계속해서 외치는 마이크. 베크나에게 패배 직전인 엘을 살리는 마법 같은 마이크의 주문. 나에겐 어린 시절 보았던 애니메이션 웨딩피치의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가 떠오르는 말이었다. 저 멀리 한반도에 사는 나에게도 사랑의 힘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면 성공한 주문이다. 유치하고 뻔한 클리셰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다. 하지만 사랑은 인류가 가진 거부할 수 없는 힘이고 테마다. 부모 자식이든, 연인이든, 형제든, 반려동물과 인간이든. 언어가 달라도 진심은 전해지기 마련이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역시 솔직한 고백만큼 힘이 되는 건 없는 것 같다. 애인한테도 꼭 해주고 싶은 주문이다.



4. 잘 만들어진 기묘한 괴생명체들

장점들을 다 떠나서 괴물들이 허접한 외형을 가졌거나 약해 빠졌다면 이미 시즌 1에서 하차했을 것이다. 

매 시즌 색다른 매력의 괴생명체들이 호킨스를 위협했는데 입이 꼭 파리지옥같이 생긴 '데모고르곤'이 시즌 4에 재등장 하자 얼마나 반갑던지(?) 처음 봤을 때도 정말 공포스러웠는데 소련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설정이라니 더욱 기괴함이 배가 됐다. 흡사 어릴 때 봤던 에일리언의 지구 버전이라고나 할까. 빠른 몸놀림에 거침없이 사람들 살점을 뜯어먹는 모습이란. 시즌 4의 베크나 역시 오컬트 영화에서나 볼법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살해하는데 사연이 있는 빌런이라 더 매력적이었다. 베크나의 존재를 보면 역시 이 드라마의 진정한 빌런은 어른인 닥터 브레너가 아닐까. 전기충격기 고문, 감금, 인권 유린. 닥터 브레너 박사는 죽는 순간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만행들을 세탁하듯이 엘에게 진심을 전했는데 솔직히 별로 안 슬펐다. 그를 돕다가 총 맞아 죽은 연구원들과 경비들에게 애도를. 괴생명체와 초자연적인 현상들의 이면에는 항상 광기 어린 과학자들의 과욕이 있기 마련이다. (이건 미국 SF시리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것 같다.) 베크나는 엘에게 잘못을 돌리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브레너의 욕심이다. 통제할 수 없는 힘을 통제하려는 욕심. 베크나를 통제하지 못하는 걸 알지만 일레븐과 같은 아이들을 육성하려 한 그의 광기. 




5. 에디, 도망쳐 제발


하이틴을 배경으로 하면 꼭 등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 농구부 주장 제이슨. 학교 제일 인싸에다가 치어리더 애인까지 있었지만 그녀가 베크나의 첫 희생자가 된다. 사람의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통해 정신에 스며드는 베크나의 정신 공격을 받고 있던 크리시는 이런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이크들이 속한 괴짜 클럽의 동아리장 '에디'를 찾아간다. 그에게 마약이라도 구해서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려고한 측은한 크리시. 그러나 에디의 집에서 마약을 건네받는 순간에 크리시는 베크나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에디는 그 광경을 보고 달아난다. 제이슨은 이 모든 살해사건이 에디가 장을 맡고 있는 보드게임 동아리 '헬파이어 클럽'의 소행이라고 생각해 자경단을 만들어 에디를 추적한다. 


경찰과 자경단 덕에 에디는 시즌 내내 도망자 신세다. 괴짜고 학교의 규율에 냉소적이지만 누구보다 보드게임과 헤비메탈에 진심인 에디는 범죄를 저지르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양아치는 아니다. 그럼에도 에디가 자수하지 못한 게 백번 이해가 간다. 공중에 사람이 떠서 팔다리가 부러지고 눈이 뽑혀서 죽었는데 그 자리엔 자기밖에 없었다고 진술하면 바로 정신병원행이거나 감옥에 갈 확률이 아주 높지 않을까? 심지어 호킨스 같이 작은 마을엔 평판이란 것이 아주 깊게 따라다닐 텐데 에디는 고등학교에서 모범생보다는 반항아 괴짜였다. 몇 년씩이나 졸업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고등학교를 길게 다니고 폭력성을 유발하는 게임이라는 '던전 앤 드래건'이 뉴스 기사로 버젓이 올라오는 시대에 던전 앤 드래곤을 즐기는 동아리의 장. 에디가 거기까지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아마 자수했더라면 황색 언론들은 소설 쓰기에 급급했을 거고 마이크네의 학교생활은 더욱 우울 해졌을 테다. 


마지막까지 도망쳐야 하지 않았을까. 이미 뒤틀린 세계에서 미끼가 된 역할을 할 때부터 사망플래그가 그득그득 차 버렸지만. 나는 그래도 살았으면 했다.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친구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다가  누명이 씌고 누명이 해결도 안 됐는데 죽는다면. 누가 그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냔 말이다. 한참 어린 동생인 더스틴에게 진심을 가지고 "변하지 말라"던 그의 헌신적인 모습이 너무 좋았고 다음 시즌이 있다면 더스틴과 좋은 호흡을 보여줄 것 같아서 스티브와 함께. 상황이 종료되고 에디를 찾는 삼촌과 여전히 살해 용의자로 남겨진 호킨스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죽음을 본 것도 더스틴 하나. 그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것도 더스틴 하나다. 시즌 4의 진정한 히어로는 사실 에디라고 생각하는데 마지막에 다른 인물들에게 그의 대한 언급이 별로 없던 것도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6. 맥스도 살고, 베크나도 살고?


빌런의 화려한 화형식으로 끝이 나나 했지만 베크나의 "네가 진거야"라는 말처럼 호킨스엔 이미 뒤틀린 공간이 아주 크게 뚫렸다. 과거 괴생명체들이 왔다 갔다 하는 작은 구멍과는 달랐다. 시즌 5는 대체 어떤 스케일로 만들려기에 이렇게 전개가 된 것인지. 윌은 여전히 베크나의 존재를 느낀다. 저 큰 구멍에서 뒤틀린 생명체들이 넘어오면 엘같은 초능력자 한 중대는 있어야 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하다.  다만 왕좌의 게임처럼 제작비나 뭐 여타 다른 외적인 요소 때문에 용두사미 드라마로 끝나질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에디는 아쉽게 떠났지만 맥스는 살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맥스지만 앞으로도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루카스에게도 아주 필요한 존재기도 하고 말이다. 


기묘한 이야기는 짱구랑 다르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인물들은 성장한다. 괴생명체와 싸우는 게 메인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 속에서 윌이나 마이크의 관계, 마이크와 엘, 루카스와 맥스의 관계 등등 인물에 감정선에 몰입하는 것도 감상 포인트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호퍼와 조이스도 물론. 그들이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방식을 보며 10대를 회상하곤 한다. 진심 어린 행동 하나하나가 그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곱씹어 볼 때가 있기 때문에 좋달까. 기묘한 이야기는 호킨스를 지킨다는 하나의 목표 속에 우정과 사랑을 담은 성장드라마다. 그래서 더 매력 있는 드라마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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