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 빨간소금
대학생 시절 학교 입학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우리 학교는 산을 끼고 있어서 주변에 상권이 크지 않았다. 입학처 특성상 고사 시즌이 되면 저녁때까지 남아야 하는 일이 많아서 끼니를 해결할 때면 항상 배달의 민족을 이용하곤 했다. 그날의 저녁메뉴를 고르는 것은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생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린 다음 날 주말에 출근했을 때, 많은 식당에서 배달을 받지 않았다. 도로가 얼어 있는 데다가 경사가 너무 져있는 학교 위치 때문에 라이더들의 콜이 잡히지 않는 것 같았다. 여러 군데와 통화를 해서 겨우 배달이 가능한 업체에 주문을 했다. 그나마도 얼마 없는 학교 근처 식당은 주말에 안 여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라이더들이 없다면 점심을 굶어야 할 판이었다. 30분쯤 지났을까 라이더분에게 전화가 왔다. 오토바이가 얼어있는 언덕을 못 올라가니 정문에서 받아가 줄 수 있느냐고 전화를 하신 거였다. 그마저도 일을 하느라 바로 받지 못하고 부재중 전화를 받았다. 라이더분의 전화를 받은 친구가 라이더분이 화를 내시는 것 같다며 되려 짜증을 냈다. 사실 이런 날엔 배달을 안 시켜 먹는 게 맞는 것이지만 어쩔수 없는 상황이겠거니 하고 달려가서 음식을 받아왔던 기억이 있다.
플랫폼 서비스의 편리함은 노동자의 압박 속에서 만들어진다. 배달의 민족과 배달의 민족 라이더스의 구분도 못했던 나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단 배달 노동자들에게뿐만 아니라 플랫폼 노동과 엮여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플랫폼이라는 자유정거장을 만들어 놓고 중개는 하고 돈은 받지만 책임을 지지 않는다. 자유 없는 자유시장의 모습이 아닐까? 플랫폼 기업은 정보의 비대칭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압박감을 계속 준다. 내가 평소에 근무를 태만하게 해서 소위 '똥콜'만 배차가 된다거나 바쁜 시간에도 배차콜이 없다거나 이러한 사정은 결국 '갑'의 위치인 플랫폼 기업이 알 수 있다. 전공시간에 배운 '노동의 소외'가 생각났다. 음식을 만들고 음식을 배달하는 노동보다 플랫폼에서 정보를 제공하고 지시하는 행위가 '갑'이 된다. 그렇다고 플랫폼 없이 일을 하자니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 뻔하다.
저자는 플랫폼의 종류와 수익의 방식 그리고 그를 통해 벌어지는 현실의 이야기를 잘 구성해서 책을 써냈다. 플랫폼이니 노동이니 아무런 관심 없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 라이더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서 쉽게 읽어나갈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개인사업자와 노동자의 경계지대를 악용하는 플랫폼의 조항들을 보면 꼭 SF영화에서 볼 법한 디스토피아적 요소가 많다. 알고리즘과 라이더의 정보를 통해 노동자의 실적에 페널티를 주고 노동자는 페널티를 받지 않기 위해 신호도 무시해가며 배달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가진 평균의 함정은 혼자 2인분 이상 할 수 있는 초인적인 에이스 라이더의 몫을 1인분이 할 수 있는 평균치로 계산한다.
플랫폼 노동자들은 서로 일면식도 없다. 유대감이 생길 수가 없는 오픈카톡방에서 정보를 공유하거나 수익을 공유한다. 뭉쳐서 서로 목소리를 낼 수가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일의 지속성 측면에서도 당장 라이더가 될 수도 당장에 오토바이를 팔고 일을 관둘 수도 있다. '이건 아니니 바꾸자'라는 목소리보다 '더러워서 때려치워야겠다'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 더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혁신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내세워 이익률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노는 알고리즘의 신에게 대항하기 위한 것은 라이더 유니온같이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달노동자에게 "그럴 권리가 있냐?"라는 알량한 능력주의의 심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다. 플랫폼 노동이 돈을 뿌리고 거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안전한 시스템에 먼저 돈을 뿌리자는 저자의 마지막 말에 동의한다. 어렵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