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필립스/윌북
학창 시절 세계사를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세계사 선생님은 소신 있지만 괴짜(?) 같은 면모도 있으셨다.
(핸드폰을 안 쓰셨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이것저것 더 있으셨던 것 같다.)
강의력도 좋으셨고 주관도 있으셔서 선생님들이나 학생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교과서 강의가 끝나고 나면 세계정세 속에서의 미국을 신랄하게 비판하시곤 했는데 나는 교과서 밖의 이야기를 더 좋아했었다. 대학도 사회탐구 과목 중 하나였던 세계사 점수덕에 대학을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면 세계사와는 꽤 인연이 깊다. 재밌다는 것에 이런저런 이유를 덧붙여서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도 역사 관련된 교양서를 꾸준히 읽고있다.
톰 필립스가 쓴 인간의 흑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에 가깝다.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인 인류의 뇌는 역사 속에서 꽤 많은 바보짓을 골라서 하곤 했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책에서는 저자의 주관이 깃든 설명 속에서 인류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통해 역사에 한 획을 그었는지 보여주는 다양한 사례들이 나온다. 인상 깊은 점은 저자가 서두에 정확히는 "인류 속에서 남자들이 한 바보 같은 사례"라고 정정하고 고 가는 것이었다. 역사라고 하면 결국 남성에 의해 남성의 이야기들이 대부분 쓰인 것이기 때문에 마이너 한 사람들의 역사는 어떤 것인지 고민해본 지점이었다. 읽다 보면 제목을 '남성의 흑역사'라고 해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아무래도 젠더문제를 다루는 책 제목 같기도 하니까 그쯤 해두고 넘어갔다.
대부분은 자연환경 속에서 인간에게 더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려는 의도로 시작된 것들이 많지만 결국에는 생태계를 교란시키거나 더 악화시키는 결말 따위들이 주가 되는데 저자의 코멘트 한 줄 한 줄이 돌려 까기에 능해서 읽다보면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영국의 전통 사냥터가 그리워 토끼를 들여온 사람의 결말이나 참새는 곡식을 먹어치우기 때문에 해로우니 모두 잡아 죽이라는 마오쩌둥의 선택.
게다가 인류의 흑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전쟁 아닌가. 전쟁사 역시 다루고 있다. 러시아에 눈독을 들인 지휘관들 모두가 혹한 앞에서 비극을 맞았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사실이어서 이 부분을 읽을 땐 꽤나 반가웠다. 히틀러의 생활이나 무능함에 대한 부분에서는 실소가 나왔다. 미친 몇몇의 통치자의 멍청한 결정들이 수 백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대목에서는 어떻게 인류가 여기까지 살아남았나 싶기도 했다.
흑역사의 흑역사가 계속 곱해지는데 인류 멸망이라는 결론까지는 아직이었나 보다.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동기를 꼽자면 역사가 '인류의 오답노트'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음.. 인류라는 친구는 아무래도 오답노트에 기록은 하고 다시 공부는 안 한 것 같다. 근대에서 현대로 오기까지의 흑역사를 봐도 아주 휘황찬란했기 때문이다. 역시 진리 명제는 함부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 시절 똑똑하다고 자부하던 많은 발명가들과 과학자들의 a~b일 것이다.라는 주장이 얼마 안 가 계속 뒤집히는 역사를 보면 말이다. 역사를 좋아하긴 하지만 역시 역사만 봐서는 기분이 마냥 좋을 수는 없다. 여전히 지구 입장에서 우리는 바이러스이거나 기생충이거나 비슷한 것이기도 하고 어느 평행세계의 지구라도 인간의 욕망은 디폴트 값이 같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는 부제는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가벼운 문체에 그렇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역사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읽기에도 부담 없이 좋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