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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누 Dec 29. 2022

천개의파랑

천선란/허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2022년을 추억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문장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던 프로게이머의 인터뷰와 그를 인터뷰한 기자의 콜라보가 만들어 낸 멋진 문장.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허황돼 보일지도 모르는 목표들이거나 생각보다 별 것 아닌 목표일지라도 꾸준하게 전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설령, 그 꿈에 다다르지 못했더라도 과정을 의미있게 기억할 수 있는 참 멋진 말 같다. '천 개의 파랑'은 올해 읽은 소설 중에서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첫 직장을 얻은 내게 집에서 독서를 할 여유는 사치였다. 

하루는 너무나 짧았다. 졸음을 이기고 출퇴근 지하철에서 자리가 남을 때마다 꺼내서 읽은 소설이었다. 빠르게 달리는 서울의 지하철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천 개의 파랑은 그렇지 않은 미래를 그렸다. 경마 기수를 대신하는 휴머노이드가 생긴 미래에도 말들은 달려야 한다. 몸이 망가져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말의 이름은 '투데이'다. 참 이름을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달려야 하고, 오늘 하루가 마지막 일 수도 있는 말 투데이. 



SF 소설 속 인간들은 너무도 인간적이라 익숙하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더욱더 인간만을 위한다는 설정은 진부할지도 모르지만 현실적이다. 콜리는 우연히 잘못 만들어져 감정에 호기심을 가지는 기계이고, 소설 속의 각각 인물들은 상처나 결핍이 있다. 인간의 쾌락을 위해 빠르게 달리다가 더 이상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말이 된 투데이는 존재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죽어야 한다고 한다. 존재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우리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퇴근길에 지하철역에서 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설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쳐있었다. 주위를 관찰하는 습관이 있는 편이라 늘 사람들을 구경하는 편인데 1호선의 퇴근길 풍경은 다른 직업의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칸이다. 카드값과 월세에 고민이 많아지는 사람들. 대부분의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남들이 뛸 때 천천히 가다간 도태된다고 교육을 했다. 결국 그 공포심에 펜을 잡아서 꾸역꾸역 대학교를 왔지만, 대학 가면 다를 것이라는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말은 반만 맞았다. 모두가 더 크고 긴 레일 속으로 들어가 달렸다. 그게 싫어서 휴학을 하기도 했지만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사회에 나오니 그 레일은 더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이미 다친 투데이의 몸을 되돌릴 순 없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행복해지는 것이다. 


소설 속의 지수와 연재의 대화는 레일 안에서 달리느라 돌아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생각나게 해 줬다. 분명 SF소설이었지만 인물들의 대화는 현실적이면서 따뜻했다. 그리고 솔직했다. 각자의 과거를 비추는 서사도 좋았고. 나는 1등처럼 달려서 결승점에 통과해 본 적은 없는 인생이지만 일단은 그들의 뒤라도 쫓아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늘 하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에게 '천천히' 자문해 봤던 시간 자체를 가지지 않았다.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걷지 않고 멈춰있는 것은 도망치는 길일 수도 있지만, 천천히 걷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야 말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아닐까 생각해본다. 읽고 나서 마음이 따뜻해진 것과 더해서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준 소설이라 더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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