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치를 보고 반해버린 나
브런치에다가 내 남자친구자랑을 하고 싶은것은 전혀 아니다. 브런치에서 다른 포스팅을 읽다가 어떤 분이 첫 데이트날에 자신의 라미네이트 사실을 밝혔다는 글을 읽고 웃음이 났다. 내 남자친구도 그랬다.
우리가 만난건 수많은 우연의 일치중의 하나였다. 나는 가끔 우주의 모든 일과 만물의 관계성이 우연과 그 우연을 하기 위한 선택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들이 만나서 생기는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내가 만약 네덜란드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 날 밤에 친구들과의 맥주 한잔 약속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일상은 180도 달랐을 것이다. 집을 나서기 전, 비가 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아 정말 오늘은 나가기 싫은데, 라는 마음을 삼키고는 그래도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사교활동을 위해 억지로 길을 나섰던 것이 생각난다.
그날 저녁 나는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아시아인 여성으로서 외국에 오래 살다보면 '옐로우 피버'를 앓고 있는 백인 남성들을 종종 만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옐로우 피버는 보통 아시안 여성들에 대한 추잡한 판타지 - 순종적이며 수줍지만 성적으로는 개방적이길 바라는 별 거지같은 환상 - 를 가지고 있는게 공통적인 특징이다. 과거의 더러운 경험들 덕분에 나는 방어적이고 까칠한 여자가 됐다.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수줍긴 개뿔, 너보다 더 터프한게 바로 나야! 라는걸 증명하고 싶었다.
친구들과 앉아있는 내게 다가오는 그에게 엄청난 경계태세를 보이며 훠이훠이 손짓으로 그냥 날 내버려둬, 라고 하던 내게 남자친구가 호탕하게 웃더니 "나 정말 이상한 사람 아니야, 그냥 네가 정말 마음에 들어. 친구라도 하자"란다. 물론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 당시만 해도 나 하나 때문에 술자리 분위기가 망쳐지는게 싫어서 어쩔수 없다는 마음도 있었고, 게다가 한편으로는 꽤 잘생긴 호감형의 인상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동하기도 했다. 나 이러다가 또 이상한 사람한테 코꿰이는거 아닌가 긴가민가 하면서 연락처를 주긴 줬지만 찝찝했다.
연락처를 주고받은 그날 저녁 이후,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오질 않았다. 수업을 들으면서도 계속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는 내 모습을 보며 친구들은 그 남자 연락 기다리지?라며 속을 더 긁어놓았다. 지금 고해성사하자면 사실 갓 새로운 나라로 이사온 나에게 한명이라도 더 친구이든, 남자친구이든지 간에 어쨌든 아는 사람이 생기는게 좀 중요하긴 했었다. 수업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인스타그램을 뒤적이던 중 뜨는 알림창. '안녕, 우리 저녁 먹을래?'
그렇게 저녁을 먹으러 갔다. 새로 이사온 도시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나를 근사하고 분위기 있지만, 요새 말하는 '힙한'감성이 물씬 풍기는 퓨전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워낙에도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친해지는 것에 큰 문제가 없었던 나라서 정말 편하게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와인도 몇 잔 나눠 마시며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 솔직히 처음엔 옐로우 피버가 있는 변태인줄 알았다고 털어놓았더니 큰소리로 웃어대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옐로우 피버는 커녕 남자친구는 네덜란드가 아닌 다른 국적의 친구를 단 한번도 사귀어본적도 없는 토종 더치남자였다. 왜 그때 하필이면 내게 연락처를 물어볼 자신감이 생겼었는지는 지금까지 아무리 캐물어도 자기도 모르겠다는 답변 뿐이다. 시시하긴.
한창 저녁을 먹고 2차로 간 펍에서 칵테일을 마시는데 갑자기 그가 보여줄것이 있다고 한다. 그러더니 그의 앞니중 하나가 갑자기 쑥 빠진다. 씩 웃는 고른 치열에서 하나가 텅 비었다. 영구 없다~ 가 저절로 떠오르는 비주얼에 이게 뭐지, 싶어서 멍하니 있다가 나도 모르게 빵 터져서 깔깔 웃었다. 너무 황당하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하기도 했다. 좀 놀라기도 했고.
"이게 내가 가진 가장 큰 비밀이야, 어차피 나중에 알게될 거라면 지금 보여주는게 낫겠다 싶었어"
이사람, 진국의 향기가 슬슬 나는데?
아직도 당황해서 어버버 하고 있는 내게
"나는 너를 한번 이상 만나서 데이트 할 거란걸 알아. 확신해"라고 말하던 모습, 난 그 모습에 반해버렸다.
첫번째로, 자신의 치부라고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을 꺼리낌없이 보여주는 자신감에 반했다. 나라면 첫 데이트때 절대로 그러지 못할 거다. 꽁꽁 숨겨뒀다가 결국엔 점점 말하기 힘들어져서 더 고생했을거다.
두번째로, 첫 데이트 만에 나와의 지속적인 만남을 원한다는 걸 유머러스하게 표현한것에 반했다. 나중에 알게 될 거니까 지금 보여준다니, 머릿속에서 계산이 끝난거다.
세번째로, 나도 벌써 콩깍지가 씌였었는지 그 빙구미소가 귀엽게 느껴져서 반했다. 거진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가 양치할 때마다 보여주는 빙구 미소에 깔깔 웃는다.
마지막으로, 그의 태도가 정말 전형적인 네덜란드 사람들의 태도라는걸 느껴서 반했다. 어떤 사람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너무 직설적이여서 상처받는다고 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너무 친절해서 직설적인거다. 네 시간낭비 하지 않게끔 대놓고 말해줄게. 라고 생각하면 쉽다.
태어나서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 도망가지 않고 계속 자기랑 만나줘서 고맙다는 이 남자. 나중에 알고보니 그 앞니는 어렸을 적 축구를 하다가 크게 다쳐 앞니를 빼버리는 수술을 해버렸고 여태까지도 임플란트를 하지 않고 틀니로 살아가고 있다. 연애 4년차인 우리, 임플란트 하는게 어때, 라고 물으니 자긴 별로 신경 안쓰이고 필요성을 못느낀단다. 역시 실용적이다.
처음 네덜란드에 와서 어쩌면 코꿰이다시피 만나게 된 지금의 파트너와의 삶은 만족도가 상당히 높다. 각각의 자유시간과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의 자유성을 완전하게 존중해주며 그 존중에는 믿음과 신뢰가 단단히 바탕이 되어준다. 그 믿음과 신뢰 또한 네덜란드 사람들의 '직설적'인 태도에서 비롯됨을 알게 된 지금, 나는 더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