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게임 퀘스트를 깨는 기분이랄까.
나이가 점점 들면서 내가 사실은 꽤나 유치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자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다이슨 청소기를 샀는데 총을 쏘는 모양과 시스템이라서 청소기를 돌리면서도 마치 내가 전쟁터에서 총을 쏴서 먼지 군사들을 빨아들인다던가, 하는 상상을 하거나 키덜트(kidult)풍의 귀엽고 아기자기하지만 정말 쓸데없는 장식품을 사모아둔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지난 포스팅에서 소개한 쓰레기 버리는 시스템 또한 카드를 대고 쓰레기를 버린다는 자체가 집안일을 해치우는 게 아니라 재미있는 미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의 맥락에서 네덜란드에 살면서 또 하나 혁명적으로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시스템이 있다. 바로 장보기.
나는 개인적으로 장 보는걸 너무너무 좋아한다. 아니했었다. 유년시절에는 장 보러 가시는 엄마를 굳이 굳이 쫓아가서 쇼핑 카트를 대신 밀겠다고 나서며 과자 한 개라도 얻어먹는 게 좋았고 그때부터 벌써 약간의 정리 강박증이 있는 내게는 잘 정돈되어 좌우 정렬되어있는 물품들을 바라만 보는 것도 좋았다. 그러다가 성인이 된 이후에는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아주 고질적이고 나쁜 버릇이 생겨 백화점뿐 아니라 모든 상점들, 특히 대형마트에 가는 것 자체를 너무나도 즐겼다. 식료품이든 생필품이든 예쁜 것, 신상품인 것에 눈이 휙휙 돌아가는 것도 좋았고, 돈을 쓰는 게 아무튼 좋았다.
이런 식으로 약간 취미활동처럼 굳이 살 것이 없어도, 약속 전에 시간이 비거나 내가 그냥 그 주변에 볼일이 있었다면 옷가게나 소품 가게들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분명히 '아이쇼핑'을 하러 간 거였는데 나올 때 정신 차려 보면 손에 뭔가 하나씩은 꼭 들려있곤 했다. 그 정도로 중증이었다. 그러다가 해외생활을 하기 시작하며 재정난과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며 돈을 물 쓰듯 펑펑 쓰는 버릇을 고치느라 아주 애를 먹었었다.
점차 내 과소비 성향을 고쳐가는 데에는 네덜란드의 좋게 말하면 소박한 문화, 나쁘게 말하면 짠돌이의 문화가 솔직히 꽤나 많이 도움이 되었다. 시시때때로 사계절 내내 다른 종류의 신발들과 옷가지를 갈아치우는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내게 잘 사는 집 딸이냐며 대놓고 물어보는 친구도 있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꽤나 직설적이기 때문에,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이런 점이 아주 마음에 든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소비 습관이 많이 개선이 된 편이다. 굳이 살 것이 없다면 구경이라도 상점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결국에 깊은 곳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는 나의 쇼핑에 대한 욕구를 풀 수 있는 곳은 슈퍼마켓뿐이다. 그런데 이 나라, 슈퍼마켓조차 심상치 않다.
네덜란드는 크게 두 가지의 국산 슈퍼마켓 프랜차이즈점이 있다. Albert Heijn (AH, 알버트 하인)과 Jumbo(윰보). 옆 나라 독일 브랜드인 Aldi와 Lidl도 종종 보이고 coop 같은 다른 슈퍼들도 있지만 알버트 하인과 윰보가 가장 보편적이다.
이 두 슈퍼마켓에서 보이는 가장 큰 특이점은 셀프 스캐너(self-scanner)가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손잡이와 바코드 리더기, 그리고 핸드폰 화면 크기의 액정이 장착된 작은 기계이다. 처음엔 이 기계를 보고도 무엇에 쓰는 것인고.. 도통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지나쳤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흐르다 보니 나의 궁금증은 날로만 커져갔다. 그래서 직원을 붙잡고 물어봤다. 그래서 셀프 스캐너이란 걸 알게 되었다. 써보니까 이거, 엄청나게 재미있다. 그리고 엄청나게 시간과 에너지 효율적이다!
이 셀프 스캐너의 사용 방법은
1. 가장 먼저 해당 슈퍼마켓의 멤버십 카드가 필요하다. 어차피 멤버십 등록 자체는 무료이고 딱히 개인정보를 제공해야 하거나 하는 그런 절차도 없다. 직원에게 물어보면 바코드가 있는 플라스틱 카드를 준다.
2. 이 멤버십 카드를 스캐너가 모여있는 곳에 읽히면 무수한 스캐너들 중 한 군데에 초록불이 들어오며 잠금이 풀린다. 이제 그 스캐너가 나의 것이다. 불이 들어오지 않은 다른 스캐너들은 '잠금'상태여서 꺼내지지 않는 상태로 고정되어있다.
3. 이제 이 스캐너를 들고 다니면서 본인이 사고 싶은 물건들을 집고, 바코드를 스캔한 뒤, 내 장바구니에 바로 넣는다.
4. 장보기가 끝났으면 계산대 근처에 있는 스캐너 수거하는 곳에 스캐너를 다시 꽂는다.
5. 셀프 계산대 (한국에서도 이제 종종 볼 수 있는 그것)에서 1번에서 썼던 멤버십 카드를 스캔하면 내가 담았던 모든 물건이 바로 화면에 뜨고, 곧장 결제화면으로 넘어간다.
6. 결제가 완료되면 영수증을 가지고 출구에 그 영수증을 스캔하면 출구가 열린다. 집에 가면 끝!
내가 왜 이 셀프 스캐너 시스템을 좋아라 하냐면,
첫 번째, 효율성을 높인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말 그대로 손님들이 들고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살 물건들을 카트에 담지 않고 자신이 미리 가져온 장바구니에 벌써부터 담도록 한다. 이로써 나중에 계산할 때 카드에서 다 물건을 꺼냈다가 다시 또 본인의 장바구니에 담아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줄이는 것이다.
두 번째, 인건비가 절약된다. 계산원이 필요 없고 정말 간단하게 결제를 하면 끝.
세 번째, 가격 비교가 너무너무 용이하다. 가끔은 중구난방으로 비슷한 종류의 제품들 탓에 헷갈리는 가격의 정보를 그냥 간단하게 스캔하면 가격이 자동으로 뜬다.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고 싶지 않다면 물건을 내려놓고 "x"를 눌러 취소한다.
네 번째, 내가 뭘 살지를 안다면 정말 5분 안에 장보기가 끝난다. 미리 작성한 리스트를 게임 미션 클리어하듯이 띡, 딱 찍고 바로 퇴장! 얼마나 간단한가!
마지막으로, 곧장 내가 담은 물건들이 얼마인지가 보이기 때문에 예산에 따라 정말 필요한 물건만 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장 볼 때 30유로를 초과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가격비교를 한다. 스캐너에서 곧장 얼마인지 보여주기 때문에 아주 쉽다.
이쯤 되면 드는 의문감. 이 슈퍼마켓들이 얼마나 사람들을 믿길래 이렇게 100% 자율성을 부여하는 거지?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작정하면 좀도둑들이 물건 훔치기에 딱 좋은 시스템인 건 확실하다. 물건을 빼놓고 스캔할 수도 있고. 이를 감시하는 시스템은 CCTV들과 랜덤 검사이다.
랜덤 검사는 말 그대로 마지막 단계 셀프 계산대에서 결제 단계 직전에 화면에 "직원이 도와주러 오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뜬다. 이 말은 '도움'이라기보다는 '네가 담은 물건들 다 담았는지 검사할 거야'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그러면 셀프 계산대 근처에서 상주하고 있는 직원이 직원용 리더기를 들고 다가와 내 장바구니 안에서 랜덤!으로 3~5개의 물품을 직접 꺼내 직원용 리더기로 읽는다. 직원용 리더기에서 그 랜덤으로 뽑힌 물건들이 다 스캔이 되었음이 확인되면 무사히 과정이 끝. 만약 이 랜덤 뽑기에서 하나라도 스캔이 안 되었다면 다 취소되고 장바구니의 물건들을 쏟아내어 하나하나 보는 앞에서 다시 스캔해야 하는... 귀찮기도 하고 창피한 일이 일어난다.
(내겐 안 일어날 줄 알았는데 너무 서두르다가 한번 스캔을 빼먹은 적이 있어서 경험이 있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귀찮게만 느껴지고 종종 시간낭비처럼 느껴지던 장보기를 나름 재미있게 해주는 구석이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콩순이 마트 계산대 같은 장난감이 있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게 놀이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된다. 가끔 바코드를 친구들에게 쏴대며 넌 얼마니? 하며 장난도 친다는건 안비밀.
만약 네덜란드에 방문할 일이 있다면 한 번쯤은 경험 삼아해 봐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