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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ro Sep 19. 2022

네덜란드인 남자친구와 혼전 동거하기

동거가 결혼보다 더 흔한 이곳

내가 처음으로 '동거'를 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이다. 남자 친구와의 동거가 아니라 그 당시 재학 중이던 고등학교의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룸메이트가 생겼고 우리는 침대 두 개, 책상 두 개, 옷장 두 개가 데칼코마니처럼 배치된 작은 방을 나눠 쓰곤 했다. 그 이후 대학교 진학을 한 후에도 줄곧 기숙사나 셰어하우스를 전전하며 나는 동거에 익숙해졌다. 오히려 집 전체를 혼자 쓰는 '자취'가 어색한 경우이다. 


그렇게 하우스메이트들과의 동거생활을 제외한 남자 친구와의 동거를 처음 하게 된 것도 호주에서이다. 내가 살던 호주 시드니는 방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방값을 제외하더라도 제대로 된 방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겨우 구한 방조차도 시티에서 한 시간이 넘게 떨어진 외곽의 어느 한 가족의 다 커서 출가한 딸이 쓰던 그녀의 어린 시절 방이었기에 나는 그 당시 간절히 이사를 바라고 있었다. 출퇴근이 매일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리던 시절이라 물불 가리지 않았고, 그 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 또한 그가 지내던 방의 컨디션이 굉장히 좋지 않아 (바퀴벌레는 기본) 함께 방을 구하기로 했다. 



왼: 시드니 뉴타운의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사진 / 오: 당시 살던 방 바로 바깥의 작은 테라스. 뒤편으론 큰 뒷마당이 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내 기억대로라면 그렇게 함께 구한 방은 한 달에 340불, 둘이 합쳐 한 달에 680불을 내던 시드니 뉴타운 (Newtown)의 찰스 가 (Charles St.)의 집 가장 뒤쪽, 뒷마당으로 연결이 되던 노랗게 페인트칠이 된 꽤 큰 방이었다. 둘이서 함께 쓸 침대며 소파 및 옷장 정도의 기본 가구가 구비되어있었고,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벽난로가 있었다는 거다. 오래된 주택이라 벽난로는 이제 기능을 하진 않았었지만 장식용이라도 로맨틱한 무드를 내줘서 참 좋아했었다. 비라도 오는 날엔 우거진 나무가 있던 뒷마당을 보고 앉아있는 게 너무 좋았다.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나는 아무래도 뼛속까지 한국인이라 그때까지만 해도 결혼도 하지 않은 남자 친구와 동거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급급했다. 부모님께는 물론 친언니에게조차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함께 산지 거의 1년이 지난 후에서야 사실 그간 같이 살았었다고 충격고백 아닌 충격고백을 했었더랬다. 안 그래도 막내딸이 이역만리 타지에서 고생한다고 걱정이 많으시던 우리 아버지는 더욱더 걱정이 심해지셨었다. 처녀가 흠잡히게 동거라니 말도 안 된다고 돈을 더 보내줄 테니 당장 방을 따로 구해서 나오라고 성화였다. 그런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호주에서의 생활을 하던 작은 딸은 꿋꿋이 동거생활을 유지했다. 방값은 둘째치고 어렵게 구한 방, 게다가 내가 맘에 드는 방을 굳이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첫 동거생활을 함께한 친구와는 4년이 가까운 연애를 한 뒤 각자의 갈길을 가게 되었다.




네덜란드에 오고 나서도 아주 처음에는 방은 혼자 쓰지만 주방이나 화장실, 욕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쓰는 셰어하우스에서 살기 시작했었다. 운이 좋게도 나를 포함한 모두가 한국인인 이른바 '한인 하우스'에서 시작한 생활은 낯설기만 했던 네덜란드 생활을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해 줬다. 생활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방의 크기가 작아도 너무 작았고 (침대와 책상만으로도 꽉 찼었다) 방값이 그에 비해 비싸도 너무 비쌌다. 틈만 나면 새로 방을 구해서 나가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그 당시 흐로닝언에서 방이나 집을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내가 아는 몇몇 친구들은 학교에서 만들어준 텐트를 친 임시숙소에서 머물고 있었던 시기였다. 충격적 이게도 실화이다. 난민수용소 같던 그곳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현재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직장인의 신분으로 아무래도 예산이 조금 더 넉넉한 편에 속했던 그는 900유로에 달하는 월세를 내며 거실과 주방 그리고 침실이 다 따로 있는, 그 당시 내 기준으로는 굉장히 호화로운 플랫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침대만으로도 비좁은 내 방에서 만나는 것보다 당연히 그의 집에서 노는 게 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새로운 방을 찾고 있었던 나를 안타까이 여겨 새로 방을 구하는 동안 '임시방편'으로 함께 지내도 좋을 것 같다는 게 최초의 아이디어였다. 그렇게 사귄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임시방편으로 시작한 동거는 지금까지 4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시피 유럽은 동거가 정말 흔하다. 너무 흔해서 사실 결혼보다 더 흔하다. 동거를 해보지 않고 결혼하는 커플이 없다고 보면 된다. 살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결혼을 해?라는 마인드라 결혼도 하기 전에 같이 산다고? 식의 한국 마인드와는 완전 정반대이다. 다른 유럽 나라에선 어떤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네덜란드와 비슷하다고 짐작할 수 있겠다. 네덜란드는 법적으로 결혼과 동거가 거의 비슷한 권리를 가진다. 네덜란드 정부 공식 사이트에 따라 네덜란드에서는 '법적인' 동거 (cohabitation)의 형식이 세 가지로 나뉜다.


1. 결혼: 우리가 알고 있는 정부에서 허락해주는 혼인관계로 시청과 정부에 반드시 등록을 해야 한다. 

2. 파트너십: 결혼을 원치 않는 커플들이 대신 선택한다. 결혼처럼 시청에 등록을 해야 한다.

3. 동거 서면 계약(cohabitation agreement, saenlevingscontract): 동거를 하는데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파트너 연금 제도 및 부가 혜택 같은 특정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공증된 동거 계약서가 필요하다. 


네덜란드에 살다 보면 종종 자녀를 둔 커플들끼리도 남편(husband)이나 아내 (wife) 대신 가장 흔하게 '동반자 (partner)'라고 상대를 지칭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보통 남편이나 파트너를 같은 용어인 'man', 아내나 파트너를 'vrouw'라고 공통적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영어로 굳이 번역하면 'my man' 혹은 'my lady'이기 때문에 그냥 편하게 파트너로 일컫는 같다. 참고로 나는 한 번도 배우자를 의미하는 정식 단어인 'echtgenoot'을 들어본 적이 없다. 


네덜란드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고도 자녀를 갖기도 하고 그런 경우에도 결혼을 한 커플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예를 들어 나의 직장 동료 중 한 명도 자신의 '여자 친구'와 거의 15년을 함께 살며 자녀를 둘, 셋도 아닌 넷씩이나 낳았다. 그래도 아직까지 결혼식도 하지 않았고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동거 서면 계약을 한 파트너들이라는 뜻이다. 그래도 여전히 둘은 부모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된다.



위의 그래프에서 보이다시피 매해 남성과 여성 모두가 결혼을 하는 비율은 점점 낮아지고 파트너십이나 동거를 하는 비율은 늘어나고 있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결혼하기 전에 먼저 얼마간 함께 살거나 아예 미혼부부로 지내는 것이 관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2021년도에는 26,149쌍의 커플이 새로 파트너십을 신청했고 56,419쌍의 커플이 결혼을 했다. 절반이 넘는 경우가 결혼을 하지 않고 대신 파트너십을 시작했다는 얘기이다.




이렇게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동거가 흔할 뿐만 아니라 결혼과 비슷한 권리를 가지게 된 데에는 문화적인 요소를 비롯하여 경제적인 요소도 작용을 한다.


남의 사생활은 남의 사생활일 뿐.

한국에서 자란 내게 동거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이 생긴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내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소위 '걸레'라고 불릴까 봐, 혹은 혼전임신으로 소문이 날까 봐 등등.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그때는 그게 당연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 부모님마저도 남들이 아는 게 내 행복보다 어쩌면 더 중요하신 분들이다. 반면 유럽에선 남들의 사생활에 전혀 일절 언급이 없다. 남들이 누구와 깨졌든, 다시 붙었든, 몇 명과 잠자리를 가지든 간에 사회생활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비슷하게 내가 성별 나이를 막론하고 누구와 동거를 하든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단거다. 그래서 더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어마 무시한 집값

사실 이 점이 가장 현실적으로 큰 동거의 이유이다.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 후 취직 후 20대 중후반, 혹은 30대까지도 부모님과 함께 살며 결혼자금을 모으는 게 형식적인 한국과는 달리 유럽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독립을 하는 게 보통이다. 부모님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등록금과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도 보통이다. 당연히 모은 돈이 없는 사회 초년생들은 방한칸을 렌트하는 셰어하우스에서 살기 시작하는데 두 명의 연인이 각각 월세를 내며 방한칸에 살바엔 차라리 둘의 예산을 합쳐 조금 더 큰 집다운 집에서 살기 시작하는 게 동거의 시작인 것이 가장 흔하다.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게 되는 당연한 과정

유럽에선 오히려 한 번도 함께 살아보지 않고 결혼을 한다고 하면 더 의아하게 생각한다. 어떻게 살아보지도 않고 확신을 가지고 파트너십도 아닌 결혼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나도 이점에서 혼전동거에 완전 찬성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살을 부대끼고 살아가다 보면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는다든지 먹은 그릇을 제때제때 치우지 않는다든지 소소한 것부터 수면 패턴, 소비패턴 등 큰 것들까지 마찰이 생기기 마련이다. 지난 20여 년간을 달리 살아온 두 성인이 결혼식 하루를 앞뒤로 같이 살기 시작한다니, 당연히 위험요소가 크다. 그러니 혼전동거를 함으로써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과 살을 맞붙이고 살 수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성교육, 임신 그리고 낙태

'동거'를 떠올리면 '원치 않는 임신'의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언급이 된다. 하지만 성교육의 메카로도 알려진 네덜란드에서는 성교육이 아주 철저하다. 콘돔 사용뿐만 아니라 피임약 사용 등 임신으로부터의 책임감과 결과에 대해 어려서부터 거의 주입식으로 교육이 된다. 특히 콘돔 사용은 성병 예방 차원으로도 상당히 강조가 된다. 다시 말해, 한 번의 실수로는 거의 임신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어쩌다가 콘돔에 구멍이 나거나 피임약 복용을 잊더라도 사후피임약을 손쉽게 드럭스토어에서 살 수도 있고, 혹여나 그걸로도 사후처리가 되지 않아 임신을 하더라도 낙태가 합법이기에 낙태를 하면 된다. 그렇다고 손가락질받거나 차별받지 않는다. 주홍글씨나 딱지가 붙지 않는단 얘기다. 둘이 이미 동거를 하는 상황이고 서로 사랑하더라도, 원치 않는 임신을 억지로 유지하는 경우는 없다. 임신을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을 하는 경우 또한 없다. 반대로 함께 살고 있는 사랑하는 사이에 생긴 아이를 결혼 없이 낳아도 같은 권리를 얻으니, 행복한 마음으로 출산을 할 수도 있다. 


(재미있는 건 내가 학교에 다닐 적만 해도 "낙태 = 수술대 위에 올라가 차가운 기구로 잔인하게 태아를 부숴서 꺼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짓말 안 하고 이와 비슷한 영상을 본듯한 기억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너무 늦지만 않는다면 알약 복용으로도 낙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 또한 "낙태 = 절대 해서는 안될 생명을 죽이는 범법행위"를 성립하기 위한 세뇌였을까?)





물론 이렇게 개방적인것만 같은 네덜란드에서도 지역이나 종교, 자라난 환경에 따라 동거에 대한 관점이 상이하기도 하다. 나도 운이 좋아서 급하다면 급하게 시작한 동거생활이 지금까지 잘 유지되어있는거다. 그래도 동거해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둘이 잘 지낼수 있다는것도 몰랐겠지만 말이다. 


지금도 내 부모님은 동거에 대해서 탐탁지 않게 여기신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남이 흉을 볼까 봐서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나의 동거 소식이 한국의 친지나 지인들까지 닿지는 않는다는 거다. 내게 동거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경제적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지낼 수 있는 방법, 감정적으로 가장 쉽게 교류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느껴진다. 이를 위해 남들의 허락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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