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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Sep 15. 2023

[별글] 153_ 필기구

  필기구에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란 얼마나 살기 편할까! 예를 들어 세미나 같은 데에서 필기를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단체로 나누어주는 볼펜으로도 서슴없이 본인의 필기를 이어나갈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끄적거리기와 글씨쓰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필기구에 몹시 예민하다는 것은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 사실 내가 가방을 잘 바꾸어 들지 않는 것은 매번 필기구를 옮겨 담아야 하기 때문이 크다. 중요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마음에 드는 펜과 종이가 없으면 낭패다. 그래서 나는 가방마다, 주머니마다 내가 견딜 수 있는 필기구를 하나씩 비치해 두고 혹시나 비상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여기저기 배치한다.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필기구는 당연히 샤프이다. 미짱은 내가 연필을 쓰는 쪽을 더 선호하기는 했지만, 필압이 높은 나는 몇 문장 쓰지도 않고 연필심이 뭉툭해지곤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샤프의 존재를 몰라서 연필깎이를 앞에 두고, 5분에 한 번씩 연필을 깎으면서 글씨를 썼다. 그랬던 나에게 샤프 펜슬은 완전히 마법이었다. 심이 뭉툭해지면 한 번만 톡 누르면 다시 기분 좋게 뾰족해지는 환상적인 일이 일어났다. 게다가 나는 샤프 펜슬에 있는 그 부드러운 부분에 반했다. 연필은 잡는 부분이 딱딱할 수밖에 없는데 샤프 펜슬의 재질은 비교적 자유로워서, 손으로 쥐는 부분이 고무로 된 종류가 있었다. 그런 부드러운 재질이 내 굳은살을 없애 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글씨를 쓸 때마다 손이 아파서 부여잡지는 않아도 되었다. 샤프심은 언제나 언제나 B였다. HB를 쓰면 필압 때문에 심이 자꾸만 부러졌고, 2B 이상을 쓰면 또다시 필압 때문에 심이 뭉개져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심지어 수능 시험장에도 나는 B 샤프심을 가져가서 챙겨 놓고, 수능 샤프에 있던 샤프심을 모두 버리고 가져간 샤프심으로 바꾸어 썼다. 


  그러다 무궁무진한 펜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처음 만난 건 물론 모나미류 볼펜이었는데 나는 끝끝내 그 종류의 볼펜과 친해지지 못했다. 지금도 친하지 않아서 무료로 나눠주는 대다수의 펜을 선호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필기감이 좋은 볼펜이라고 해도 그 종류는 글씨를 슬슬 날려 멋지게 쓸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나같은 꾹꾹이들은 젤펜, 그것도 너무 얇지도 굵지도 않은 선의 젤펜이 필요했다. 친구들이 좋아한 하이테크씨는 내가 쓰면 눌러쓰다가 망가뜨렸다. 그것보다 훨씬 굵은 젤리 롤 펜은 종이가 찢어지거나 뒷면에 번져버리곤 했다. 그렇게 여러 차례 헤매다 시그노 0.38에 정착해 지금까지도 쓰고 있다. 


  하도 필기구에 예민하다 보니 이 분야에서는 불매도 안 되고(원래는 일본 제품은 잘 안 쓰는데 말이다) 한 번 마음에 드는 필기구가 있으면 언제 또 이런 필기구를 만날 수 있을지 몰라서 아예 박스째로 사놓고 쓴다.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나의 고집이 마음에 든다. 일단 정착만 하면, 그 필기구를 쥐기만 하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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