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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Sep 12. 2023

[별글] 152_ 가장 나다운 행동

  우리 동아리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생일파티를 한다. 생일 케이크는 그 달에 생일인 사람들을 모아서 한꺼번에 축하하고, '패들릿'이라는 공간에서 롤링페이퍼를 작성해 전달한다. 그리고 내가 동아리에서 담당한 직책에는 사람들의 생일을 챙기고 기타 친목과 관련된 이벤트를 도모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어서, 매번 생일 며칠 전에 패들릿을 만들고 생일자를 뺀 나머지 동아리 구성원들에게 돌린다. 일주일 전쯤에는 케이크도 예약해야 한다. 예를 들어 8월 생일자들의 공통점을 엮어 케이크를 디자인하고 (그들의 공통점은 천재라는 점이어서 '8월엔 천재가 많이 태어나나봐'라는 문구를 박았다) 예약하고, 송금한다. 그리고 내 몫의 롤링 페이퍼까지 작성하면 내 역할이 끝난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번 9월에는 생일자가 딱 한 명이었는데, 케이크 예약까지는 완벽히 끝내놓고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생일자의 남자친구에게 'ㅇㅇ이 케이크 예약한 날 연습 나오지?'라고 확인하던 중, 그 남자친구가 '그런데 패들릿은...?' 하고 물어보았다. 완벽히 잊고 있었던 나의 안일함에 충격받아 아침에 5분간 침대에 머리를 박고 자책하고 있었다. 어쨌든 6시간만에 사람들의 롤링 페이퍼를 전부 받아내기는 했지만 나는 이런 순간이 가장 나다운 순간이라고, 우습게 도 생각한다. 


  내 실체를 잘 모르는 친구들은 내가 덤벙거리는, '아 맞다!'형 인간인 걸 잘 모른다. MBTI로 따지면 J 쪽으로 오해를 많이 받는달까.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에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에서 비극을 야무짐으로, 희극을 얼레벌레로 바꾸면 딱 나다. 멀리서 보면 자기 일 잘 챙기고 뭐든 성실히 해내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볼수록 덤벙거리고 자기 물건조차 못 챙기는 그런 사람이 바로 나다. 


  이런 성격은 어느 성격이 그렇듯 양날의 검이다(놀랍게도 좋은 점도 있다). 예를 들어서 에너지를 과하게 투자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점은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내 친구 중에는 플랜 B, C, D까지 세우느라 늘 스트레스를 받는 친구가 있다. 그녀는 웬만한 변수에는 대비가 되어 있어 놀라지 않고 바로 다음 계획을 실행한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일상에 드는 에너지가 내가 보기에는 과도하다. 나는 일이 일단 일어나면 그 다음에 어떻게든 수습하는 편이라 점점 상황 판단력과 인지적 순발력이 늘고 있는데, 대신 가끔은... 이러다 정말 한 번 크게 사고를 치거나 인생이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은 의도적으로 일주일에 하루쯤을 비워서 다음 주의 나를 위한 선물을 마련한다. 지난 주 토요일에는 월요일에 써야 할 과외자료를 미리 만들고, 수요일에 수업할 부분의 내용을 미리 읽어두었다. 이렇게 해도 분명 내 성격상 빠지는 부분이 많을 테지만, 준비를 했는데도 엉성한 부분이 바로 가장 나다운 부분이라고도 생각해서 그냥 그대로 사랑해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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