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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Sep 15. 2023

[별글] 154_ 전 애인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이상적인 경우라면 연애가 끝나고 나서도 친구로 지내는 쪽이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연예인이라거나, 건너건너 들은 소식에는 헤어지고 나서도 서로에게 여지를 주는 일이 전혀 없이 친구로 어울리거나 원래 같이 속한 조직의 모임에 함께 나가는 (구) 커플이 있다고도 들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둘 다 참 괜찮은 사람이었나보다 하고 인간 자체에 호감도가 올라가는 것 같기는 하다. 문제는 그런 경우가 유니콘처럼 느껴질만큼 적은 데다가, 나만 그렇게 삐딱하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 저럴 거면 그냥 계속 만나지 하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잘 지낼 때 멀쩡한 정신으로 생각해 보면 산뜻한 이별을 하고 나서 친구로 남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한쪽은 좋아하는 마음이 소진되고, 다른 한 쪽은 남아있는 상황에서 계속 두 사람이 만나는 건 마음이 남아있는 사람에게 고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 애인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려면 우선 우정과 사랑의 차이점부터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독점적인 관계? 아니면 객관적 지표에 비해 서로 더 예쁘게 봐주는 것? 사람마다 이 기준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친구가 해도 괜찮지만 애인이 하면 서운한 행동이 있다. 나의 경우 친구는 생일을 며칠 늦게 챙겨주어도 괜찮지만 애인이 그러면 서운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반대로 애인이 하면 괜찮지만 친구가 하면 서운한 행동도 있다. 예를 들어 애인은 나랑 있는 동안 잠시 게임을 해도 되지만 친구가 그러면 (같이 있는 시간의 절대량이 다르기 때문에) 속상하다. 어쨌든 이런 기준이 합의된 사람들끼리 연애를 한다. 극단적으로 누구나 공감할 만한 예시를 들자면 소개팅이다. 친구가 소개팅을 받는다고 하면 기뻐해주거나 최소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겠지만, 애인이 소개팅을 받는다고 하면... 애초에 이런 상황은 생기면 안 된다. 한 쪽의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에서 연애가 종결되고 친구로 남으면, 한 사람은 여전히 내심 연인의 기준을 적용하고 싶어하고 다른 한 사람은 친구의 기준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것이다.


  당장 지금의 짝꿍과 헤어지고 영원히 갈라설 것인지 친구로 남을 것인지, 하는 선택지가 닥쳤을 때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나에게 그런 선택지가 주어졌던 적은 딱 두 번이 있었다. 내가 헤어짐을 고했을 때는 상대방이 친구로라도 지내자고 애원했을 때가 한 번도 없어서 잘 모르겠다. 첫사랑이 이별을 고했을 때 나는 친구라도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런데 지금 만나는 짝꿍과 이별을 고려했던 때는, 영원히 안 보는 거면 몰라도 친구로 남는 건 죽어도 싫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첫사랑은 잘 쳐줘도 순하긴 했지만 다정하진 않았다. 나에 대한 사랑이 있었지만 몸에 밴 배려나 반듯한 다정함은 없었다. 지금의 짝꿍은 사람을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천성적 다정함에 사랑까지 더해진 시너지적 애정을 나에게 준다. 내 애인의 친구들이 보기에는 다정함만으로 관계의 온도가 높다고 생각하겠지만, 시너지적 애정을 받는 입장에서는 사랑이 빠지고 다정함만 남았을 때 그 온도차가 더 크게 느껴질 것 같다. 아마 그 공허함을 직감하고 친구로 남느니 영원히 안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도 양자 간의 관계만 고려했을 때에는 덜 복잡한 것 같다. 애인과 친구 관계로 돌아갔는데, 나나 전 애인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기면 그때 가서 껄끄럽다고 헤어지자니 지금껏 의식해왔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계속 친구로 지내자니 새로운 애인에게도, 전 애인에게도 못할 짓이다. 결국은 그런 새로운 관계를 고려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 애인과 친구로 지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그래도 친구로 지내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아예 모르는 척하고 사는 게, 서로 죽이고 싶은 사이가 되는 것보다는 건강한 것 같다. 나에게는 서로 죽이고 싶어하는 전 연인도, 일방적으로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전 연인도, 일방적으로 내가 죽이고 싶어하는 전 연인도 있는데 셋 다 건강한 관계와는 딱 들어도 거리가 멀다. 모르는 척하는 사이가 되면 언젠가는, 이제쯤은 친구가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순간이 온다. 나도 이제 와서는 첫사랑과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자고 굳이 말하기에는 너무 뒷북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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