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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Sep 16. 2023

[별글] 155_ 잠 버튼의 소유자

  중학교 때 성당 캠프에서 있던 일이다. 아침에 기상송을 듣고 졸린 눈을 힘겹게 뜨며 일어나니 친구들이 갑자기 박수를 쳤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내가 눕자마자 잠들어서 너무 신기했다면서, 뒷통수에 잠 버튼이 달렸냐고 했다. 다들 낯선 곳에서 잠을 이루기 힘들어했는데 나는 잠드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한동안 성당 친구들은 나를 '잠 버튼의 소유자'라고 불렀다. RPG 게임에서 닉네임 앞에 붙이는 타이틀처럼 나를 따라다녔고 나는 그 호칭이 꽤 영광스러웠다. 


  어지간해서는 잘 잔다는 특성이 나에겐 은근한 자랑이다. 중간에 잘 깨지도 않는다. 어쩌다 수분을 너무 많이 섭취한 날이면 중간에 한 번쯤 화장실에 가야 해서 깰 때도 있지만, 그런 날은 매우 드물다. 밤에 한두 번씩은 꼭 깨는 사람들은 잘 자는 유전자 자체가 축복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상적인 잠자리에 필요한 조건이 많지 않다.


  그래도 딱 한 가지, 내가 잠들기 어려운 조건이 있다면 밝은 장소이다. 환하게 밝은 장소에서 이불도 없이 자라고 하면 정말 잠들기 어렵다. 다만 이불이 하나라도 주어진다면 이불 안에 얼굴까지 넣고 몸을 말고 들어가 나만의 어둠을 창출한다. 암막 커튼이 있다면 좀 더 좋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이상적이다. 작년에 짝꿍에게 이상한 주사가 생겨서 술만 마시면 잘 때 불을 끄지 말라고 했었다. 그때 얼마나 밤마다 괴로웠는지 모른다. 


  소음에는 그다지 예민하지 않다. 몇 년 전 뮤직캠프 때는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앉아 수다를 떠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만 자서 사람들을 놀래킨 적이 있다. 다만 휴대폰의 인공적인 소리에는 무조건 깬다. 밤 사이에 무엇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늘 비행기 모드를 해두고 잠에 든다. 그래서 종종 급한 전화를 놓치기도 하고, 실수로 알람을 안 맞춘 날이면 세상 모르고 늦잠을 자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잠에 잘 들고, 중간에 잘 깨지 않는 대신 중간에 깨면 다시 잠들기를 어려워하기에, 어떤 인공적인 소리도 나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올해 가장 짜증났던 날을 꼽으라면 아침에 오경보가 쩌렁쩌렁하게 울려서 잠이 깨버렸던 날이다. 


  결국 나에게 이상적인 잠자리는 충분히 어둡고, 나를 방해할 인공적인 소리가 나지 않으며, 8시간 이상 잘 수 있는 상태이기만 하면 된다. 알람 없이 잘 수 있으면 더 좋다. 다만 이 최소 조건이 지켜지지 않으면 마음이 매우 난폭해진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지만 뾰족한 예민함은 티가 난다. 내가 전반적으로 온순해 보인다면 어지간해서는 잠을 잘 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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