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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Sep 18. 2023

[별글] 156_ 오렌지 주스

  여러 종류의 음료 셀렉션이 있다면 그중에서 주스는 내 마지막 픽이다. 일단 당연히 맥주가 일등이고, 주류가 없다면 제로콜라 등 대체당 음료수, 그것도 없으면 물이나 적당한 당이 첨가된 우유나 오트밀크, 그다음 마지막이 과일주스다. 아무리 좋은 원재료를 썼다고 해도 그 안에 든 단맛이 날 장기적으로 괴롭힐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과일을 통째로 갈아서 만든 주스는 다르다. 과일 맛이 그대로 느껴지고 씹는 수고만 믹서기가 대신 해준 느낌이다. 여전히 과당이 무서워서 일부러 찾아 먹지는 않지만 말이다.


  얼마 전 포르투갈에서 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오렌지 생과일주스가 맛있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굳이 찾아 먹지는 않았다. 그러다 야외에서 취침한 다음날, 갑자기 느닷없이 오렌지 주스가 먹고 싶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몸살 기운을 느낀 날이었다. 몸이 으슬으슬하고 한 걸음 떼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오렌지 주스를 파는 곳은 너무 멀었지만(마트에도 팔기는 했는데 맛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나는 굳이 힘들게 몸을 일으켜 20분을 걸어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러 갔다. 반드시 그 오렌지 주스를 당장 먹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은 욕구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는 얼마 앓지 않고 감기 기운은 지나가 버렸다. 


  아마 오렌지 주스의 비타민 C 성분이 컨디션을 개선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겠거니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지고 있던 종합비타민 한 알이나, 쏠라씨를 먹는 게 훨씬 빠르고 간편하게 나의 피로를 낫게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 해서 비타민 영양제가 생리적으로 '당기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미짱은 감기기운이 있을 때 의식적으로 집에 있는 비타민 C 영양제 두 알을 삼키긴 한다. 하지만 심리적 만족감은 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위를 뚫고 오렌지 주스를 파는 곳까지 기어가서 얼음을 띄운 그 주스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켰을 때, 온몸의 세포가 기뻐하는 기분이었다. 빈혈에 어질어질할 때 순대가 먹고싶어지는 것처럼, 나는 감기 기운이 있으면 먹지도 않던 오렌지 주스가 당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절대 잊지 못할 스페인어 단어가 하나 생겼는데, 바로 오렌지를 뜻하는 'laranja'이다. 그곳의 laranja 주스는 껍질과 꼭지까지 통째로 갈아서 묘하게 씁쓸하고 배로 상큼한 끝맛이 남는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감기 기운에도 당기지 않는 비타민 알약을 삼키며 laranja를 그리워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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