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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Sep 28. 2023

[별글] 166_ 추석

  책임이 많을수록 짜증이 많아지는 계절, 바야흐로 추석이다. 책임질 거라고는 그다지 없던 어린 시절에도 추석은 마음에 드는 연휴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주변 사람들의 짜증이 느껴져서 더 그렇다. 추석엔 주변의 어른을 얼마나 챙겨야 할 것인지의 문제로 이제 막 어른이 된 어른들부터, 어른이 된지 한참이지만 여전히 주변에 어른들이 남아있는 어른들이 모조리 골머리를 앓는다. 인사를 드리느니 선물을 드리느니 언제부터 찾아뵈어서 몇 시간을 머물러야 하느니 하는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몇 년 전 추석부터는 삐딱선을 탔다. 


  원래라면 추석 연휴 3일은 비워둬야 맞다. 운이 좋게도 지방에 가야 고향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 어떻게 가족행사 일정이 잡힐지 모르므로 추석에는 약속도 잡지 않고 얌전히 집에서 대기하던 나다. 이제는 자취와 함께 생활 반경이 달라졌다는 핑계도 있고, 성인이 되어서 이런저런 나만의 책임감이 많아졌다는 핑계도 있어서 굳이 추석에도 다른 약속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번 연휴에도 매일 과외를 잡아 두었고, 친구들도 거리낌없이 만나고, 당일에만 화곡동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고 일정을 비워 두었다. 


  원하지 않는 책임을 지는 사람들은 이 시기에 짜증이 많아진다. 오늘만 해도 애꿎은 아이에게 짜증을 전가하는 보호자를 둘이나 봤다(별 것도 아닌 아이의 투정에 과하게 혼을 내는 식이었다). 미짱은 그 광경을 보고 역시 명절은 없어져야 한다고 했다. 풍요로운 추석 되라는 말만큼 나에게 공허하게 다가오는 말도 없다. 나는 해가 갈수록 추석에 기상천외한 비-명절적 일을 벌일 것이다. 재작년에는 연구실에서 음악을 틀어두고 춤을 추었고 작년에는 친구들이랑 클라이밍을 했다. 올해의 추석 당일에는 집에 친구들을 불렀고 추석과 관련된 음식은 모조리 금지했다. 친구들은 와인을 가져올 예정이고 나는 파스타를 해먹을 거다. 


  빨간 날은 반갑지만 추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는 빨간 날은 싫다. 왠지 싫은 일을 잔뜩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어떻게든 좋아하는 일로 채우려고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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