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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Dec 18. 2023

[별글] 200_ 중독 속으로

  누구나 살아있다는 사실을 짜릿하게 느끼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뮤지컬 <빨래>에서는 집주인 할머니가 고된 노동을 하면서 살아 있으니까 빨래도 하고 밥도 하는 거라고 노래한다. 나 역시 그런 일상의 노동이나 짜증스러운 순간에서도 생기를 느끼는, 살아있는 데에 꽤 최적화된 인간이긴 하다. 그러나 내가 진짜로 살아있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할 때는 무언가 행위에 중독될 때다. 


  중독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범주는 두 종류 정도다. 알코올이나 카페인, 마약 같은 물질중독, 그리고 도박이나 게임 같은 행위중독의 범주가 있다. 나는 물질 중독에 취약한 편은 아니고 그다지 중독된 상태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물론 심각한 중독 상태를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마는, 무언가 물질에 중독되어 자제력을 잃은 모습은 상상도 잘 가지 않고 절대로 겪어보고 싶지 않다. 카페인이건 알코올이건 의존 정도야 가끔 생기지만, 더 위험한 물질에는 다가가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 물질중독의 위험성을 겪은 적은 없다.


  내가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중독은 가벼운 게임 중독이다. 진짜로 게임을 좋아하고 많이 하는 사람이 보면 그게 무슨 중독이냐고 비웃을 정도의 단계이지만, 어른이 될 때까지 게임과 담을 쌓고 살아온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하루에 서너 시간을 뭉텅이로 게임에 쓰는 내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내 기준에서는 중독처럼 느껴지지만 이걸 중독이라고 할 수 있을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그래도 될 때만 푹 빠지는데다가 할일이 많아지면 언제나 할일이 우선순위가 되기 때문이다. 짝꿍은 시험기간에 게임 한 판만 같이 하자고 나와 합의했다가 내가 한 판을 졌는데도 그냥 아~ 재미있었다 하고 털고 일어나는 걸 보고 기겁했다. 이길 때까지가 한 판이지, 어떻게 한 판만 하자고 했다고 정말 한 판만 할 수가 있냐고. 어떻게 그렇게 미련이 없냐고. 게임에는 찐막, 찐찐막, 찐찐찐막까지도 있다고 했다(진짜로 마지막 판이라면서 계속 하는 현상을 말함). 물론 더 하면야 재미있겠지만 자제력이 앞선달까, 정말로 남는 시간만 기꺼이 게임을 위해 내어줄 수 있달까. 일상에 방해가 될 정도로 무리해서 게임하는 일은 지금까지는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자제력이 매우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아니다. 장기적으로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가시간을 몽땅 게임에 쏟아부으면 안 된다. 책도 읽어야 하고 글도 써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밖에도 나가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가벼운 중독 상태에 빠진 기간이면 나는 2-3주 정도의 여유 시간을 거의 몽땅 게임에 가져다 바친다. 최근에도 롤토체스라는 게임에 빠져서, 보고서까지 전부 마무리하고 진짜 종강을 맞이하여 칩거하면서 게임에 시간을 모두 투자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런 증상(?)을 유발한 게임은 동물의 숲, 마비노기,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하스스톤, 그리고 롤토체스이다(보면 알겠지만 히오스를 제외하면 컨트롤이 필요없는 게임이다. 나는 순발력이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이런 가벼운 비정상의 상태를 내가 좋아한다고까지 말하는 이유는, 나의 경우에 무언가에 빠지기까지의 심리적 장벽이 너무 커서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게임도 제대로 하려면 세계관도 알아야 하고, 스킬명도 익혀야 하고, 구동 방식도 알아야 하고, '그냥 외워야' 하는 단계가 어느 정도는 필요한데 내 머리의 게임 데이터베이스가 너무 작아서 이 과정부터 쉽지가 않다. 지금 하고 있는 게임도 짝꿍이 하자고 열심히 설득해서 배워보려는 단계에 오기까지도 두 달이 넘게 걸렸다. 일주일 동안은 뭐가 뭔지도 몰라서 엉뚱한 플레이로 연패의 쓴맛을 봐야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못하나 하는 스트레스를 넘어 순수한 재미만을 느끼기까지 일주일이라는 또 하나의 장벽. 그 장벽을 넘었다는 성취감과, 지금만이 가장 가열차게 즐길 수 있는 때라는 확신 아닌 확신 때문에 도파민의 파도를 있는 힘껏 즐기는 것이다. 나는 길어야 한 달 지나면 게임을 거들떠도 보지 않거나, 아니면 정말로 '하루에 한 판만' 시기가 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패턴이 없었으면 가벼운 중독 상태를 못 즐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만약 진짜로 일상생활이 무너지거나 게임 때문에 성적에 쓴맛을 보았다면 나는 무언가 게임을 시작하는 상황을 극도로 경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에 몇 번 안 남았을 것 같은 이 황금 같은 잉여의 시기에, 순수한 재미를 찾을 수 있었음은 그저 기쁨이 되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고 다시 한 판만, 아니 여러 판 재미의 파도를 타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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