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르 Apr 05. 2024

[별글] 235_ 회색 새내기

  약속된 봄이 있었다. 지금의 고등학교는 분위기가 어떨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대학에 가면 모든 게 나아진다 주문을 외는 낡은 사고방식의 지배를 받는 학교에 다니는 바람에, 스무살을 간절히 기다렸다. 솔직히 말하면 시험과 수업, 수행평가가 반복되는 고등학교 생활이 그리 나쁘지 않았어서, '이것보다도 더 좋아진다고?'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내가 성적이 좋아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심한 학교폭력을 당했었는데 그 이후의 학창생활은 그 해와 비교되어 친구만 있으면 뭐라도 좋았다. 특히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전공 과 개념이 존재해서, 반이 두 반 사이에서만 섞였다. 그 말은, 3년 간 같은 반인 친구가 절반 정도라는 뜻이다. 안정적이고 긴 인간관계를 좋아하는 나는 반 친구들과 가족 같은 관계가 되었다. 그것도 대학의 새봄이라는 같은 꿈을 꾸는 희망찬 가족이었다. 


  다 좋아질 거라는 말은 막연했지만, 선생님들로선 어쩔 수 없었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술이나 담배, 밤새 게임하며 보내는 방탕한 생활, 뭐 그런 '미성년자에게 제약이 있지만 성인은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해로운 행동'으로 우리를 회유(?)할 수도 없었을 거고 말이다. 그렇다고 명과 암을 모두 알려주기에는 우리가 입시에 대한 열의를 잃을까 겁이 났던 게 아닐까? 우린 그렇게 불행하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생활이 많이 답답하고 힘들지 않냐는 질문을 계속해서 받았고, 그런 제약이 성인이 되면 사라질 것이며 자유로운 캠퍼스 생활이 시작될 것이라는 다짐이 이어졌다. 


  그럭저럭 수능을 잘 보고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공부 잘했구나 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다들 내가 대학교 1학년, 갓 스무 살 새내기라고 하면 부럽다고 했다. 취업 준비중인 선배들도 한숨을 푹푹 쉬면서 좋을 때라고 했고, 성당의 아는 어른들도 너무 좋겠다며 자기 딸(또는 아들)도 나처럼 대학에 턱 붙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새내기 때 내내 슬펐다. 


  출석을 부를 때 누군가 없어도 아무도 웅성거리지 않아서 슬펐다. 내가 수업에 결석해도 이렇게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말인가?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그땐 처음으로 익명의 존재가 된다는 게 서글프게 느껴졌다. 누군가와 점심을 같이 먹으려면 따로 약속을 잡아야 해서 슬펐다.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아도 함께 급식실에 춥다 덥다 갖은 투정을 부리며 뛰어가던 나날이 자꾸 생각났다. '담임선생님'과 '내 교실'이 없어서 슬펐다.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자유는 거꾸로 말하면 아무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심지어는 교재에 답지가 없어서도 슬펐다. 아주 친절한 교재(주로 이과의 과학이나 수학 기본 개념서)도 연습문제 중 홀수 번호에만 답이 있고 풀이과정은 이마저도 감사하라는 듯 쿨하게 간결했다. 나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는데 동시에 너무 많아서 슬펐다. 언니 오빠들은 내가 화장을 안하고 다닐 때나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을 때 그 사실을 지적하며 조언이나 충고를 던지거나 놀렸다. 


  당연히 고등학교 때보다 몸은 자유로웠다. 공강 시간에 나는 신촌에 있는 카페에서 빙수를 먹기도 하고 도서관에 가서 목적 없이 헤매기도 했다. 더 야무진 친구들은 벌써부터 연극이니 축제니 하는 것들을 즐기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지금 나는 세 번째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기나긴 대학 생활 내내 '대학 축제'라는 곳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친구랑 노는 내 모습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고 더군다나 혼자 가는 건 더욱 상상이 되지 않았다. 붕 뜬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바쁘게 약속을 잡고 과외를 하러 다녔다. 아, 약속을 잡고 사람을 만나는 건 또 왜 이리 비싼지. 과외비는 벌어도 벌어도 모자란 것 같았다. 급식실에서 한참 떠들고 운동장을 돌면서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도 수다를 떨어도 공짜였는데 말이다. 누군가를 알아갈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서, 마음을 전하려면 매점 음식을 사는 것보다 훨씬 훨씬 많은 돈이 필요해서 슬펐다. 


  외롭고 슬픈 내가 당시에 들어간 합창 동아리에 마음을 빼앗긴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끔, 내가 다른 대형 동아리에 들어갔다면 그만큼이나 동아리에 과몰입할 일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애매하게 스무 명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는 우리 동아리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파트로 구성되어 있어서 어느 파트라도 모자라면 노래가 제대로 완성되지 않는다. 내가 없으면 늘 어디 갔냐고 찾는 느낌이 좋았다. 다른 친구들은 출결 관리가 엄격하다며 툴툴댔지만 나는 그 소속감에 안정감을 느꼈다. 스무 살 내내 아무런 준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기분에 서글펐는데 동아리는 나름대로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둥지가 되어 주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수능 꿈 대신 야자하는 꿈을 자주 꿨다. 악몽의 형태로가 아니라, 그리워하는 형태로 말이다. 깨어나면 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서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누구나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지만, 고등학생과 대학생만큼의 극적인 변화를 그렇게 어린 나이에 겪어야 한다면 1년 정도 과도기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꼭 대학생활이 아니더라도, 종일 고등학교에 묶여 있는 생활에서 풀려나 전부 알아서 해야 하는 삶 속에서 방향을 잡는 법을 알려주는 멘토 제도를 둔다던가.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 새내기 시절을 보냈지만, 분명 많은 친구들은 이게 맞나 어리둥절해하고 있었을 거라 확신한다. 난 나만 힘들어하는 줄 알고 더 외로웠지만, 돌이켜보니 다들 기뻐야 한다는 강박 속에 남들이 다 좋다는 시기를 어리둥절 떠나보냈다. 


  지금 다니는 학교 생활에는 열 살을 더 먹고 들어왔는데도 그 어떤 대학 생활보다 낭만이 있다. 어른으로서의 이점을 누릴 줄 알게 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탐색한 시간이 누적되어서도 있겠지만, 과 동기들끼리 모든 수업을 같이 듣는 고등학교 같은 분위기가 한몫 한다고 생각한다. 동기들은 교수님의 머리 스타일을 칭찬하며 웃고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좋은 아침!'이라고 씩씩하게 인사한다(교대 친구들은 모르지만 일반 대학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시간표를 선택할 수도 없고 수강신청은 선택 과목인 한두 과목만 한다(그마저도 시간대는 거의 정해져 있다). 몇몇 동기들은 이런 생활이 다소 고등학교스럽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진짜 대학생활'이 해보고 싶다고 한다. 진짜 대학생활을 정작 알고 있는 나는, 다시는 회색 새내기 시절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작가의 이전글 [별글] 233_ 위로를 때로 잘하는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