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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Apr 28. 2024

[별글] 236_ 답이 정해져 있을지라도

  나는 G를 정말 좋아했지만 견디지 못하겠던 지점이 있었다. 그 친구는 정말 예뻤다. 나는 그 친구를 보면서 미모의 빈익빈 부익부를 느꼈다. 아니, 사실 빈익빈은 모르겠고 부익부는 확실히 느꼈다. 나는 필러와 보톡스의 차이도 제대로 모르는데 그 친구는 피부과의 온갖 자잘한 시술과 주사의 종류를 꿰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자기에게 딱 필요한 시술이 뭔지를 알았다. 솔직히 내가 그런 시술을 받았다면 (당연히 성형은 아니니까) 드라마틱한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을 것이며 거울을 보고 딱히 감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G는 어떤 시술을 받고 나서도 거울을 보고 감동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별다른 조치 없이도 그녀의 얼굴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그 감동이 G로 하여금 자꾸만 에스테틱 비용을 추가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수많은 시술 중 몇 가지는 분명 효과가 있었을 것이고, 물리적으로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G는 점점 아름다워졌다. 


  이렇게 적으면 내가 G의 미모를 견디지 못했던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G는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닮았고, 활짝 웃으면 그 연예인보다 예뻐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는 어땠는지 몰라도 나에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더 빛나게 보는 필터가 있다. 그러니까 그녀의 얼굴은 내가 G를 좋아하는 이유에 가까웠으면 가까웠다는 말이다. 얼굴만이 아니라 모든 구석이 그랬다. 나는 염색을 하면 개털이 되는데 G는 탈색을 하고 다시 염색을 해서 머리를 캐러멜 색으로 물들이고도 늘 찰랑이는 머리를 반짝이고 다녔다. 매일 샵에 다니는 게 아니고서야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G와 함께 다니면 신기한 일이 많았다. 길을 다닐 때면 길거리 캐스팅처럼, 쇼핑몰이나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명함을 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아, 물론 내가 받은 건 당연히 아니고 받는 광경을 구경한 거지만. 번호를 따려는 사람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예쁜 여자들은 이렇게 조용히 길을 걸을 수도 없는 건가 생각이 들어 불쌍할 지경이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면 G가 부러워서 견디지 못했나 싶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구나 싶었지 별로 부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차라리 내가 빈말이라도 부럽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걸. '우와, 명함을 또 받았어? 도대체 몇 번째야?' 라거나, '이야~ 우리 G 연예인이다 연예인.'과 같은 감탄을 내뱉었다면, G가 얌전해졌을 텐데. 누군가 G에게 말을 걸면 나는 그냥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을 보거나 신발끈을 고쳐 묶거나, 하늘이나 멍하게 쳐다보다 그 사람이 가고 나면 심상하게 가자, 라고 했다. G는 그게 못 견디게 거슬렸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별아~ 우리 둘이 걷고 있는데 왜 저 사람이 나한테만 말을 걸었지?'라거나 '어? 또 나만 명함을 받았네? 왜지?' 이런 질문들. 그 질문들은 '네가 예쁘니까' 같은 모호한 대답으로는 뭉뚱그려지지 않았다. '네가 나와 비교해서 월등히 예쁘니까'라고 인정할 때까지 비슷한 질문들이 끈질기게 따라왔다. 


  다른 친구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며 하소연을 하면 친구들은 쌍욕을 하며 G가 나를 만만하게 보고 무시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만 아니라면 G는 나를 무시하는 일이 전혀 없을 뿐더러 오히려 나를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자꾸만 앞서 서술한 일이 유사하게 반복되자 우리는 둘 다 지쳐버렸다(심지어 어느 날은 나에게,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얼굴을 보고 좋아하는 게 아닐 테니 진정성을 알 수 있어서 부럽다는 말까지 했다. 이 말을 듣고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정말 녹다운이 되어 버렸다). 


  2010년대 초반에 인터넷을 열심히 했던 사람이 기억할, '답정너'라는 신조어가 있었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의 줄임말로, 네이버에 검색하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 은근히 유도하는 화법' 정도로 뜻이 정리되어 있다. 당연히 모든 신조어가 그렇듯 사전적 의미가 엄밀하지는 않지만, 특징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원하는 답이 정해져 있다. 

  2. 그렇다고 그 말이 듣고 싶다고 직접 말해 주지는 않는다. 

  3. 그러므로, 원하는 말을 해주려면 상대방에게 어느 정도의 눈치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한동안 나는 내가 답정너를 싫어한다고 여겼다. 이런 화법이 다분히 수동공격적이기도 하고, 빤히 아는 사실을 말해달라고 눈치를 주는 일은 실제로 꽤 피곤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 몇 명의 추가적인 '답정너'들을 만나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답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었다. 너 진짜 꼼꼼하다, 똑똑하다, 잘생겼다, 튼튼하다, 예쁘다, 귀엽다, 등등 그것이 어떤 말이 되었건 말이다. 그 친구도 만약 나에게 끊임없이 예쁘다고 말해달라고 암시했다면 백 번이고 이백 번이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빈말이나 거짓말이어야 어렵지, 그 친구는 진짜로 예뻤으니까. G와 내가 어그러진 진짜 이유는 G가 답정너여서가 아니었다. G가 원한 답이 '네가 나와 비교해서 훨씬 예뻐'였던 문제였다. G의 얼굴이 내가 그녀를 좋아한 이유 하나였을지언정 나와의 격차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 답정너가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자아가 있고, 남들에게 이런 모습으로 해석되고 싶다, 하는 희망사항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그 희망사항을 직접 표현하는 것도 나름 귀여운 매력이 있지만, 매번 '나 힙하다고 말해줘!' '나 웃기다고 말해줘!' 요구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다만 내가 상대방에게 원하는 답을 준다면, 그 사람의 고유성에 대한 감탄이면 좋겠지, 나와 경쟁하듯 비교해서 판단한 결과는 딱히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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