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19_ 어떤 증오는 그리움을 닮아서

by 벼르

얄궂게도 지워지지 않는 문장들이 있다. 나는 보통은 좋은 일을 오래 기억하고 나쁜 일은 쉽게 잊는 편이다. 그렇지만 도망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작은 지옥 안에서 들은 말은 마음에 또박또박 새겨져 있기도 하다. 돌려 말하기를 멈추면, 중학교 2학년 때의 따돌림의 경험이다. 최근 <더 글로리>를 인상깊게 봐서 유독 그 문장들이 의식의 수면 위에 올라와 있기도 하다. 이 기억의 쓰임은 뭘까? 어느 날 가해자를 우연히 만나 그가 15년 전 읊었던 문장들을 하나하나 돌려주어 당황하는 얼굴을 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기억한 건 아니고, 들으면서 머리가 새하얘졌던 말들이라 그냥 강렬하게 각인되어 버렸다.


당시 난 전교에서 손꼽을 정도는 아니어도 반에서 손꼽을 정도는 되는 성적을 받는 아이였다. 가해자들은 틈만 나면 그 사실을 상기했다. 어떤 일로 꼬투리를 잡히건 그랬다. 예를 들어 내가 처음 괴롭힘을 당한 계기는 우습게도 레이업 슛(농구) 수행평가였다. 오른발, 왼발, 슛 순서였던가. 그 과정은 기억이 정확히 나지 않지만 애들은 내가 왼발을 딛어야 할 타이밍에 오른발을 딛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태클을 걸었다. 너 공부 잘한다면서, 왼쪽 오른쪽도 구분을 못 해? 너 병신이야? 그럼 어떻게 지난번 시험에 잘 본 거야? 너 설마 컨닝한 거야? 야 씨발 얘 컨닝했나봐, 꼰지르러 가자. 그런 말이 기억난다.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어서 답도 못했다. 땅을 쳐다보며 주눅든 표정을 지어야 상황이 빨리 끝났다. 괜히 오른발로 땅을 툭툭 건드려보았다. 내가 지금 오른발로 땅을 차고 있는 게 맞나. 애들 말대로 나는 왼쪽 오른쪽 구분도 못하는 병신이 아닐까? 사실 난 왼쪽 발로 땅을 차면서 오른쪽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미친년이 우리가 얘기하는 중인데 딴생각을 한다며 머리채를 잡혔다. 머리채를 잡힌 그 순간에도 지금 잡힌 게 내 왼쪽 머리채인가, 오른쪽 머리채인가 헷갈려했다.


그땐 실감하지 못했지만, 세상엔 오지랖이 넓어서 누군가의 생을 우연히 구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애들은 공원에서 나를 빙글 둘러싸고 한사람 한사람 차례로 폭언을 가하는 중이었다. 한낮의 공원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단 생각에 좌절할 때쯤 가끔, 이틀에 한 번 꼴로 오지랖 넓은 어른이 끼어들었다. "너희 지금 뭐 해?" 그런 분들은 함부로 상황을 단정짓지도 않고 넌지시 물었다. 그럴 때면 갑자기 주동자는 내 어깨에 자기 팔을 올리고 말했다. "저희 친구예요. 그냥 놀고 있는 중이에요. 친해요. 맞지?" 그리고 죽일 듯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면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억지로 고개를 주억거리면 그 어른은 미심쩍은 얼굴로 자리를 뜨고, 시야에서 어른이 사라지면 그애는 나를 있는 힘껏 밀치고 자기 팔에 더러운 게 묻었다는 듯 털어냈다. "아, 씨발. 봤냐? 나 지금 방금 얘 만졌어." 그럴 때면 오물이 된 기분이었다. 더러운 게 묻은 기분은 나도 마찬가지였는데도.


그 나날의 모든 문장을 사실 잊을 수 없다. 나를 가장 좌절하게 했던 담임 선생님의 말도. 우리 엄마는 중학교 선생님이었고, 선생님들 사이에는 어떻게든 커넥션이 있기 마련이어서 나의 담임 선생님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엄마는 부디, 나를 잘 지켜봐달라고, 요즘 학교생활이 힘든 것 같다고 간곡히 빌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담임선생님은 종례시간에 말했다. "요즘 뭐, 한별이를 괴롭힌다느니 그런 얘기가 있던데, 너네 그러지 마라. 알겠니?" 주동자는 날 보고 '네가 간이 부어서 담임에게 꼰질렀구나' 하는 눈을 했고 나는 그날도 공원에 끌려가겠거니 짐작했다. 나는 그날 청소당번이었다. 가해자들은 내 청소가 끝날 때까지 무섭도록 기다렸다. 담임 선생님이 남아서 뭐 하냐고 물으시는데, 걔네는 나랑 놀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걔들을 소외된 나와 놀아주는 좋은 학생들이라는 듯 대하며 기특해했다. 학교에서 내가 기댈 곳은 없구나 확신했던 순간이었다.


공교롭게도 요즘 핫한 그 드라마처럼, 나를 가해했던 주동자의 이름에도 박, 그리고 연이 들어간다. 나는 그 애를, 그 시절을 전혀 그리워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나에게 이제 더이상 상처가 되지도 않는다고 여길 만큼 단단해졌다. 그렇게 믿었는데, 사실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그 문장들을 떠올릴 때면 나는 다시 중학교 2학년 어린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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