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18_너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던

by 벼르

대부분의 자기소개서 항목은 자신의 단점이나 약점을 쓰라고 요구한다. 난 늘 뭘 원하고 그런 걸 쓰라고 하는 건지 영문을 몰랐다. 자기소개서에 쓸 수 있을 정도의 약점이라면 숨기지 않아도 딱히 큰일나지 않을 소소한 약점일 테니까. 나 역시 대학원에 진학할 때도, 인턴에 지원할 때도 나름대로 약점을 기술했지만 딱히 약점이 아닌 특성이었다. 완벽주의 성향이 지나치다(전혀 사실이 아니다)거나 타인을 과하게 배려한다느니(사실이긴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 단점이 아니다) 하는 거짓 약점들 말이다. 혼자서만 알고싶은 진짜 약점이 몇 가지 있긴 하다.


먼저 이미 들켜버린 약점이 있다. 모두가 공공연하게 알고 있어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나의 드러난 약점은, 시간 관리에 약하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능력을 과대 평가한다. 내가 가장 존경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는, 무리가 될 것 같아서 새로운 과업을 수락하지 않는 사람이다. 또는 오늘의 일정이 있기 때문에 즉흥적인 맥주 한 잔을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과외가 스케줄을 가득 메우고 있어도 번역 아르바이트가 들어오면 승낙하는 사람이고, 오늘 잠들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어도 당장의 맥주를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잠을 줄이면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고 믿고 일을 수락하다보면 나의 일정은 어느새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어 있다. 내 친구들은 내 일정표가 이 모양인걸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가 약속 잡기를 망설일 때 너라면 그럴 수 있다며 관대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다음으로는 들키고 싶은 마음이 절반, 숨기고 싶은 마음이 절반인 약점이 있다. 그건 바로 내가 미루고 늘어져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앞의 약점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일을 몰아서 하는 편이라서 크게 다르지는 않다. 사람들은 내가 소위 말하는 '갓생'을 산다고 생각한다. 왜 쉴새없이 바쁜 삶을 '갓생(신의 삶의 형태)'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적당한 거리를 가진 사람들은 내가 끊임없이 생산적인 일을 벌이고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집에서 하염없이 누워있는 걸 좋아한다. 집안에서 누워있을 수 있는데 굳이 서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래서 나의 집은 엉망이고, 밖에서도 정리정돈은 잘 안 하는 사람이지만 집에서는 남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르고 사는 사람이라서 친구들 보기 부끄럽긴 하다.


마지막으로는 이상하게 들키고 싶지 않은 자기관리의 영역이 있다. 나는 자연스럽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커서 그런지 내가 식단 관리를 하고 있다거나, 운동을 꾸준히 한다는 사실을 보이고 싶지 않다. 어쩌면 거식증에 걸렸을 때 남들이 내가 뭘 먹는지, 얼마나 움직이는지에 관심을 지나치게 가져서 그때 신물이 난 것일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외모에 관해 평가적으로 발언하거나 외모를 의식하고 있는 일 자체가 피상적인 사람의 행동으로 느껴지고,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큰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지난 번에 만났을 때보다 덩치가 두 배가 되어 온다고 해도, 필사적으로 외모와 관련한 발언을 참는다. 내가 못나졌을 때 사람들이 닥쳐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칭찬을 딱히 참지는 않지만, 칭찬마저도 잘 어울리는 옷차림이나 액세서리에 관한 말이지, 살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을 입에 담는 일 자체가 나에게는 낯설고 별로라고 느껴진다.


친구 중 하나는 섭식장애가 있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먹토'를 하는데, 어느 날인가는 나에게 자기가 최근에 먹토를 했다고 고백했다. 그걸 나에게 왜 말했냐고 물으니,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하면서 먹토를 하다 보면 그 행동이 건강에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도와달라는 건 아니고, 그냥 내가 아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누구라도 그걸 알면 그 사람이 본다고 생각해서라도 자제할 수 있다고 했다. 비밀이 힘을 잃을 때 난 좀 더 건강해질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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