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17_ 밀당이라는 환상

by 벼르

나는 상대방을 좋아하는데 상대방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 상황이, 그러니까 좋아하는 마음이 쌍방향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계절이었다. 보잘것없는 이유로, 그러니까 친구들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따라 좋아하다가 그 아이돌 가수를 닮았다는 이유로 좋아진 남자애가 있었다. 그 애는 도무지 연애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가 사귀자는 티를 계속 냈는데도 그애는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난 그애를 포기하는 대신 엄마에게 조언을 받고자 했다. 엄만 아빠가 자꾸 확신을 주지 않기에, 이제 그만 따라다니겠다고, 그동안 미안했다고 선포(!)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빠가 엄마의 소매를 잡으며 가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장면이 둘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엄마의 러브스톨에서 영감을 심각하게 받은 나는 곧바로 그 남자애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것도 창의성도 없이 답습해서.

"그동안 귀찮게 해서 미안해, 이제 좋아하는 티 그만 낼게."

그에 대한 답장은 이랬다.

"그럼 사귀자."


밀당의 힘이었을까? 나는 작전이 성공한 데에 놀라워하면서도 이해가 안 갔다. 설마 자기에게 관심없는 여자친구를 바라는 건 아닐테고, 도대체 저 대화는 왜 성립된 걸까? 글을 쓰면서도 상대방의 심리가 좀 웃기다. 아무튼 그 사건으로 인해 내가 달아나면 상대방이 잡는다, 라는 명제는 나에게 각인되었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달아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랑에 있어서도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태가 안 나는 법이다. 결국 난 쿨하지 않다는 걸 금방 들켜버렸다. 여자친구라는 지위를 획득한 나는 금세 또 상대방을 꽉 붙잡고 말았다.


나는 밀당을 못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밀당을 고평가하는 사람들을 조금 삐딱하게 본다. 나는 내가 미는 척을 하지 않아도 나를 좋아해줄 사람을 원한다..는 걸 차치하고라도, 애초에 왜 연인에게 밀당을 하려 하는 걸까? 물론 세상엔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머리를 굴릴 시간에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 더 하는 사람이고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연애에서 밀당이 필수라는 양 군다. 내 짝꿍은 나와의 연애가 처음인데, 왜 밀당을 하지 않냐고 나에게 진심으로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다. 그땐 진짜 제대로 된 연애를 하려면 밀당이 필수인 것인가 하고 혼란스러웠는데, 지금은 그냥 내 짝꿍이 세상의 시선에 많이 세뇌되었었구나 싶다.


설익은 사랑 이야기에 어른들은 함부로 웃음을 터뜨리지만, 우리가 아는 사랑의 형태는 그런 것뿐이었기에 누구보다 진지했다. 귀엽다고 웃는 건 예의가 아니다. 인터넷 소설을 어설프게 따라했던 남자애들도, 뻔한 수작에 뒤집어질 듯 행복해하던 여자애들도 모두 진심이었다. 난 진심을 닮은 마음이 좋고, 그런 의미에서 머리를 써서 밀고 당기는 건 아무래도 내 취향이 아니다. 진지하게 고민해 봐도 밀 시간이 어딨나 싶다. 아까운 이 인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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