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16_ 마음을 먹지 않아도

by 벼르

후 하고 심호흡을 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있다. 허리를 꼿꼿이 세워야만 예뻐 보이는 원피스라거나, 한 번 시작하면 엔딩을 보아야만 해서 좀처럼 시작을 못 하는 게임이라거나. 반대로 이상하게 손이 많이 가는 물건이나 옷은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다. 휘뚜루 마뚜루 입을 수 있는 조거 팬츠, 한 판에 5분도 안 걸리는 게임 같은.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는 책에서는 우리를 움직이는 시스템 1과 시스템 2를 소개한다. 우리는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빠른 직관인 시스템 1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능숙한 운전자는 한가한 고속도로에서 운전할 때 시스템 1을 사용한다.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는 시스템 2를 사용한다. 능숙한 운전자라고 해도 비 오는 밤 골목길에서 운전할 때는 시스템 2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시스템 1로 움직인 나의 아침은 이렇다. 외출 15분 전에 일어나 화장실로 기어가다시피 걸어가 물세수를 한다. 로션과 선크림을 아무렇게나 바르고 어제 입은 바지를 그대로 주워입는다. 최소한의 고민조차 없이 손에 잡히는 아무 상의나 입는다. 그리고 거울도 보지 않고 머리만 질끈 묶고 나선다(사실 이 모든 과정은 불도 켜지 않고 이루어진다). 반면 시스템 2를 사용한 아침은 이렇다. 일단 외출하기 최소한 한 시간 전에 일어나야 한다. 성의 있게 옷을 골라 입는 데 10분,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상의나 하의를 바꾸며 고민하는 데 또 10분. 최적의 컨디션을 위해 식사 20분, 세안과 화장 10분, 마지막으로 빠뜨린 준비물은 없는지 챙기느라 10분을 쓰고 나간다. 매일 아침 나가기 한 시간 전, 그리고 15분 전에 각각 알람을 맞춰놓고 고민한다. 졸림을 무릅쓰고 시스템 2를 사용해볼 것인가, 아니면 잠을 선택하고 시스템 1로 급히 아침을 보낼 것인가. 문제는 시스템 1을 사용해도 하루가 어떻게든 시작된다는 것이며, 시스템 2는 정말이지 너무 귀찮다는 것이다.


손이 많이 가는 옷, 그리고 물건은 대부분 과하게 편하고, 그래서 유혹적이다. 뻔해서 내 마음에 덜 드는 것 빼고는 크게 문제가 있지도 않다. 정성껏 준비하고 나선 하루에 비해 급하게 출발한 날은 묘하게 삐그덕거리긴 한다. 립밤을 챙기지 못해서 하루종일 실시간으로 입술이 부르튼다거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쓰지 않아도 될 식비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아침잠 30분이 뿌리치기 힘든 건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어떨 때는 너무 피곤해서, 어떨 때는 직전의 악몽을 지워내고 새로운 꿈을 꾸고 싶어서(?) 다시 눈을 감는다. 하지만 시스템 2를 사용한 아침으로 시작한 하루는 종일 기분이 좋다. 평소에 안 입던 옷, 손이 안 가던 향수는 생일에 근접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니까. 정리하면 이렇게 답이 뻔한 것을, 그렇지만 나는 내일 아침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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