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난 가진 특권이 너무 많아서 특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부끄러워한다. 사회경제적 배경부터 그렇다. 엄마는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목동 거지라고 자주 말했지만 금수저니 은수저니 하는 구분에서 나는 최소 은수저는 된다고 늘 생각하며 살았다. 비교하자면 끝도 없고, 돈 때문에 아쉬웠던 적도 많지만 전체 집단을 놓고 보면 나는 금전적으로도 많이 누리며 살았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이고, 이성애자이고, 경제적 기반이 있는 나는 사회경제적으로도 특권층이지만 나에겐 이런 외적인 부분은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의 특권이 있다. 마음의 여유다.
한국에서 어떻게 이렇게 자녀를 키웠을까 싶을 정도로, 엄마는 느긋했다. 나는 아빠의 무관심(애정이 없었다는 건 아니고 학업에 딱히 압박을 주지 않았다)과 엄마의 무덤덤함 틈에서 자랐다. 동네가 동네인지라 우리 엄마는 주변 어머니들에게 자주 타박을 들었다. 애를 이렇게 방치하면 큰일난다고, 지금 나이(초등학교 5학년이었다)면 하루에 영단어를 250개씩은 외워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 친구들이 경쟁적으로 학원을 다녀도 나는 놀이터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나는 맨날 놀이터에 있는데 애들은 며칠에 한 번씩만 놀 수 있어서, 매일 노는 친구들이 달라졌다. 나의 공부에 적용되는 규칙은 딱 하나였다. 숙제를 안 하면 혼난다는 것. 그건 선생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달리고 있는데 딱히 안 그래도 된다는 메시지 자체가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해도 거리낌이 없고, 인생의 항로를 크게 틀어도 무덤덤하게 지지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다. 넘어져도 일어나겠거니 생각하게 되고,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지나가겠거니 여긴다. 윤리적인 문제를 저지르지만 않으면 나의 장기적인 평화를 깰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 모든 과정이 의식하지 않아도 일어난다. 지지적인 원가족이라는 행운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여전히 생경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한국 최고의 대학으로 여겨지는 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 졸업장을 가뿐히 무시하고 서른이 넘어 생뚱맞은 대학에 입학했다. 이 두 문장이 나의 특권을 요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