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을 수 있습니까

나에게 비출산은 이기적 선택이 아니라 선에 대한 지향이다

by 벼르

그저께 학교에 가는 길에 <하면 좋습니까>라는 책을 읽었다. 다음에 연재되던 웹툰을 엮어 책으로 발행한 것인데 이 작품에서 목적어는 결혼이다. 요약하자면, 오랜 기간 동거 중인 두 연인이 굳이 지금의 평화를 깨고 결혼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내용. 이미 만족스러운 동거 생활을 하던 두 사람이 결혼에 대해 고민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여자 주인공이 갑자기 아파 쓰러져 병원에 간다. 응급수술이 필요한 상황인데, 남자 주인공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할 수 없다. 함께 살며 서로의 일상을 지켜주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건강하고 젊은(나이가 깡패라지 않은가) 나지만 가끔은 응급실에 갈 만큼 아프다. 왜 늘 급작스러운 아픔은 주말이나 새벽에 찾아오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대낮에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대충 약을 먹고 뻐기다가, 병원 문이 다 닫히는 밤이 되어서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 엄마가 응급실에 나를 끌고가는 패턴이다. 엄마는 항상, 언제나, 예외없이 응급실에 동행했다. 가장 최근에 응급실에 간 건 장염과 위경련이 동시에 들이닥쳤던 때였다. 살짝 체했나보네, 하고 호기롭게 계란죽을 끓였는데 몇 술 뜨다 말고 전부 토했다. 나는 어지간해서는 토하지 않는 사람이라 먹은 걸 전부 쏟아내고 나서야 심각성을 느꼈다. 그래도 그냥 누워서 쉬면 되겠지, 하고 끙끙대던 나를 엄마가 일으켜 응급실로 데려갔다. 이유 모를 두통에 울면서 응급실에 갈 때도, 한밤중에 열이 올라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도 엄마는 내 손을 붙들고 택시를 잡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 명백한 보호자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서류 상의 보호자가 실제로 좋은 보호자가 되어주지 않는 경우가 세상에는 아주 많다.




애인은 내가 갑자기 쓰러졌을 때 병원에서 보호자가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을 몰랐다고 했다. 내가 해당 만화의 부분을 캡쳐해서 보내주었을 때 '그렇구나...' 하고 답장했다. 우리는 서로의 분명한 울타리가 (아직) 되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쉽지만 아득하거나 막막하지는 않다. 엄마아빠는 내가 새벽에 울면서 전화를 걸면 놀라서 바로 달려올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정상가족이 될 잠재성을 품고 있는 이성애자 커플이므로, 언젠가는 부부가 되어 서로의 법적 보호자가 되어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둘 다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보호자가 보호자다웠음을, 우연히 이성애자임을 순전한 행운의 산물로 여기며 아동인권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기를 간절히 바란다(스스로의 행운을 곱씹으며 누군가의 안위를 바라는 일이 옳은지 고민이다. 언젠가 그 고민에 대해 본격적으로 풀어볼 생각이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뭘까? 누군가의 생물학적 부모이자 보호자가 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은 어느 범위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행하고 있는 걸까? 나는 종종 아이를 낳는 건 친구를 집에 초대하는 일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한다. 마음이 앞서 생각한다면 어서 초대하고 싶지만, 집이 엉망진창이라면? 이왕 소중한 친구를 집에 불러온다면, 친구가 즐겁게 머물렀으면 한다. 청소는 너무나 귀찮지만 친구에게 예의를 차리기 위해 나는 아마 집을 치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가 '태어나기 잘 했다!'하고 생각할 만큼 예쁜 세상에 초대하고 싶다. 거대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나는 내 아이를, 내 아이는 나를 세상에서 제일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엄마에게 그런 것처럼, 그 아이는 언젠가 내 최고의 친구가 되어줄 수도 있다. 그런 존재를 세상에 불러오는 건 엄청난 일이다. 아이가 '이런 데로 나를 왜 불렀어?' 하고 묻는다면 나의 마음은 찢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있는 똥부터 먼저 치우고 싶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만족할 만큼의 클린한 세상이 도래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하나 더. 인간 하나를 만들기 위해 다른 인간이 얼마나 갈려나가는지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우리가 당연하게 행하는 걷기, 잠자기, 숟가락으로 적절한 양의 밥을 떠서 정확한 각도로 입으로 가져가 먹기. 변의나 요의가 느껴지면 '이럴 때는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본 후 적절한 처리를 하고 손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이 모든 당연한 일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 우리 엄마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켰을까. 얼마나 많은 사리를 길러냈을까.




내가 애인의 보호자가 되어주는 것과 내가 내 아이를 낳아 그 아이의 보호자가 되는 것-은 결이 다르다. 내 애인은 성인이고, 내가 없이도 어찌 되었든 물리적으로 생존할 수는 있다. 그런데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는 일정 기간 동안은 성인인 나의 보호 없이는 생존조차 할 수 없을 것이고 그 보호의 기억은 서로에게 영원히 각인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강한 보호자가 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아무래도 나는 아이를 못 낳지 싶다. 일단 저질러놓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기에 나는 미래의 아이를 너무 사랑한다.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나는 그 아이를 선명히 사랑한다. 어느날 친구와 이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이런 적이 있다.




"근데 그러면, 세상엔 아마 생각 없는 사람들만 남게 될 거야."

"왜?!"

"너같이 고민이 너무 많은 애들은 안 낳고, 생각 없는 유전자는 계속 대물림되고."

"아... 그러면 파이를 늘리기 위해서라도 낳아야 하나?"




물론 우스갯소리다. 나처럼 치열한 고민 끝에 'YES'라는 결론을 내리는 과-생각인들이 많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세상의 어딘가에 존재할, 생각 많은 인간의 유전자를 대물림해주실 분들께 지지와 축복을 보낸다.




어쨌든,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다. 누군가는 나의 궤변을 듣고 핑계도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애인의 베개에서는 늘 분명한 애인의 체향이 난다. 애인에게서 직접 맡는 체향이 아니라 어딘가에 배어있는 체향을 느낄 때면 어쩐지 서글퍼진다. 빈자리를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매일매일 베고 자는 베개니까 분명한 향기가 나지만, 애인이 세 밤만 침대를 비워도 이 향은 점점 사그라들 것이다. 사랑하는 건 어쩌면 끝없는 무서움을 안고 살게 되는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걸 상상만 해도 무섭다. 내가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애인만큼이나, 어쩌면 더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무서움을 두 배로 불릴 자신이 아직은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병원에 갈 때뿐이 아니다. 엄마는 내가 엄마를 필요로 할 때면 항상, 언제나, 예외 없이 달려왔다. 길에서 어떤 아저씨가 허벅지를 만져놓고 내가 쳐다보니 되려 화를 내서 엉엉 울면서 전화를 했을 때도. 새벽에 놀다가 택시가 영 안 잡혀서 갑자기 무서움이 몰려와 데려와달라고 전화를 했을 때도. 밤이건 새벽이건 예외는 없었다. 나라면 내가 잠든 사이에 누군가 위급상황이 생겨 전화를 했더라도 깜깜 몰랐을 것이다. 내 잠이 너무 소중한 나는 95퍼센트의 확률로 비행기모드를 해두고 자니까(5퍼센트는 술에 취해 쓰러지거나 웹툰을 보다 잠드는 경우이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는, 잠을 너무 좋아하는 기질을 나에게 물려준 바로 그 엄마는, 잠보다도 내가 소중해서 언제나 나를 보호해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우리 엄마는 아마 오늘도 핸드폰을 끄지 못하고 잠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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