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 같은 인연

어떤 인연은 밀린 숙제를 치우는 기분으로 만나기도 한다

by 벼르

때는 약 15년 전 엄마아빠의 결혼기념일. 나와 내 동생은 엄마아빠를 기쁘고 놀라게 해주려고 대대적인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사실 내 동생은 내가 하자는 대로 끌려온 것에 가까웠지만. 우리는 엄마아빠의 연애 시절, 신혼 시절, 우리가 어릴 때(그때도 어렸지만 더 애기 때) 사진을 마구 스크랩하고 메모를 덧붙여, <미영이와 재만이의 사랑 이야기> 이야기책을 만들어냈다. 당연히 엄마아빠는 감동을 받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좀 아찔하다. 디지털 사진을 편집해서 파워포인트로 스크랩한 것도 아니고, 필름 카메라로 인화한 사진을 멋대로 꺼내어 자르다니. 다행히 딸들의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에 화로 대처할 분들이 아니셔서, 가벼운 해프닝으로 넘어갔던 것 같다. 심지어 '정말 고맙고 기쁘지만, 사진을 이렇게 자르면 안 돼~'하는 가벼운 나무람도 없었던 것 같다(워낙 긍정적인 꼬마였던 내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나저나 그 귀찮은 일을 어떻게 한 걸까. 물론 지금보다 여유 시간이 많아서 가능했던 일이지만 나는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벤트를 꾸미는 일을 좋아한다. 요즘 내 이벤트의 최대 수혜자는 물론 애인이다. 맛있는 걸 먹이고 다정한 말을 전하려 매일매일 살뜰히 챙긴다. 특별한 날에는 그 매일보다 조금 더 엑스트라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니까 15년 전의 내 세상에서 우리 엄마아빠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가 가장 기쁘게 해주고 싶은 대상이었던 것이다.

제일 사랑하는 포커스 인물이 아니더라도, 나는 다정함을 선물하는 걸 정말 좋아한다. 이유 없이 꽃을, 생일에는 편지를, 생각나서 챙긴 간식을 안겨준다. 좋아함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시간과 돈, 마음을 쓰는 거라고 하던가.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시간도 돈도 아끼지 않는다. 반대로 나의 좋아하는 감정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차없다. 시간도 돈도 마음도 아낀다.

가끔 곤란할 때가 있다면, 나는 A라는 친구에 대해 더이상 그만큼 마음을 쓰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A가 여전히 나의 다정함을 기억하고 있을 때. '변했다'는 말을 듣는 것도 싫고 누군가 나에게 말없이 서운해하는 건 정말 질색이다.

어제 만난 친구 중 하나는 사실 나에게 숙제 같은 인연이다. 내 주변에 몇 없는 유형이다. 이제 내 인생에 남아있는 친구들은 떨어져 있으면 너무 보고싶은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숙제 같은 인연은 이런 느낌이다. 상대가 만나자고 하면 만난다. 굳이 내가 먼저 약속을 잡자고 말을 꺼내지는 않는다. 대신 너무 비싼 음식점에는 가지 않는다. 정말정말 분위기가 괜찮으면 딱 2차까지는 간다. 만나기 전 선작업을 하지 않는다(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간식거리를 바리바리 챙긴다거나 작은 쪽지라도 준비한다거나). 그래서 어제는 아무 준비 없이, 작은 디저트만 사들고(이것도 그 중 다른 친구가 좋아할 것 같아서 챙긴) 약속 장소에 갔다. 그렇게 생각 없이 갔으니 내가 숙제 같다고 느끼는 그 친구가 쇼핑백에 웬 카드를 챙겨온 것을 곁눈질로 봤을 때,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관계에 있어서 상호 호혜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내가 신경 안 쓰는 상대라고 해도 상대방이 나를 너무 좋아하는 경우에는 마음이 절대 편치 않다.

결론은? 청첩장이었다. 나를 오랜만에 만난다고 준비한 손편지 카드가 아니라 청! 첩! 장! 애초에 만나자고 약속을 잡은 것도 보고싶어서가 아니라 청첩장을 전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마음이 평안해졌다. 이정도의 거리감, 아주 좋아. 결혼식에 안 갈만큼 싫어하는 사이는 아니다. 다만 바리바리 이벤트를 챙길만큼의 마음은 안 쓰고싶을 뿐이다. 만약 정말 손편지를 받았다면 나는 또 언제 어떻게 보답할지 얼마나 낑낑거렸을까.

팔랑팔랑 자취방으로 돌아와 애인에게 자랑을 했다.

"나 청첩장 받았어! 너무너무 신기하지 않아?"

"뭐가 신기해?"

"그냥~ 어쩐지 어른 같잖아!"

"결혼한다고 어른인가아~"

말끝을 늘이며 게임에 집중하는 게 딱 애인다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첩장을 처음 받아봐서 설렌 나는 다시 또 청첩장을 열어보고, 우아 우아 하면서 지금 들고 있는 게 내 청첩장이면 기분이 어떨지, 우리 엄마 아빠 이름이 박혀있는 걸 보면 어떤 기분일지 마음껏 상상했다.

밤에 자려고 나란히 누웠는데 문득 그저께 내가 사고친 게 생각이 났다. 네스프레소 커피 캡슐을 주문해야 하는데 결제가 잘 되지 않아서, 다른 결제방식으로 시도하다가... 어쩌다 보니 두 번 결제가 되었고 캡슐이 두 배로 오게 생겼다는 이야기. 내역이 바로바로 반영되지 않아서 설마, 한 번만 주문했겠지 생각했는데 어제 확인해보니 이럴 수가, 똑같은 주문이 두 번 들어간 것이다.

"내가 지금부터 진짜 심각한 이야기를 할 거야."

"뭔데?"

평소처럼 장난을 치려는 줄 알고 웃음 띤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가 내 표정이 자못 진지한 것을 느꼈는지 미소를 거두는 내 애인.

"진짜 진지한거야. 심각 심각."

"왜 그래..?"

"먼저 나 안 혼낸다고 약속해."

"응, 약속."

"뭔지도 모르고 약속해도 돼?"

"혼 안 낼게. 뭔데?"

"주문이 두 번 들어갔어."

"...?"

"캡슐이 200개쯤 올 거야."

그제서야 상황을 알아챈 애인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린다. 내가 말해놓고도 나도 웃겨서 등을 돌리고 한참을 웃었다. 대화를 이어가려고 눈을 다시 마주치다 다시 너무 웃겨서 한참을 웃느라 대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겨우겨우 웃음을 수습하고 내가 다시 말을 꺼냈다.

"1년 먹으면 먹어지겠지 뭐, 그치?"

"미안한데 반 년이면 될 거야."

그러게. 두 배로 샀으면 두 배로 오래 먹으면 되지. 뭘 걱정했던 건지, 참. 그리고 어차피 내 애인은 커피 마니아인데. 애인은 내 고민을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만들어 주는 재주가 있다(아무 것도 아닌 '취급'을 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어떻게 실토해야 애인이 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지 고민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사실 숙제 같이 느껴지는 인연의 결말을 알고 있다. 매번 만날 때마다 이제 1년 정도는 만나자고 안 하겠지, 하고 안도한다. 그리고 1년 후 또 약속에 나가기 귀찮아서 동동거릴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인연이 정리되겠지. 이 인연의 파이널 프로젝트는 절연이라는 걸 사실은 안다. 그 과정을 명시적으로 겪기에는 적의가 있는 대상도 아니고 절연 자체도 마음을 써야 하는 일인지라, 미루기의 달인답게 미루고 있을 뿐이다.

한때 연애에 대해서도 숙제처럼 느꼈던 적이 있다. 상대방이 나의 행동이 소홀해졌다고 느껴서 갈등으로 이어지면 피곤하니까, 적절한 타이밍에 숙제처럼 표현을 하고 선물을 했었다. 물론 그렇게 의무처럼 느껴졌던 이전 연애들의 파이널 프로젝트는 모두 이별이었다.

난 사실 인생의 커다란 숙제들을 잘게 쪼개놓고 처리한 일은 색연필로 쫙쫙 그으며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꼭 해야 하는 숙제만큼은 잘 처리하는 나의 성격이 적응적인 삶을 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인연에 있어서만큼은 아니었으면 한다. 안 그래도 숙제는 너무 많으니까, 내 사람들은 숙제같지 않은 사람들만 남기고 싶다. 듀데이트가 없으면 끝나지도 않으니까. 삶이 지속되는 한은 계속되어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아무래도 내가 숙제같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나를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이지 싶다. 내 실수에도 웃음이 터져 이내 새근새근 잠들어 버린 내 애인처럼.

오늘의 추신.

방금 네스프레소 배송이 오늘 오후에 온다고 문자가 왔다. 아마 집에 남아있는 애인이 배송을 받겠지. 어제 힘껏 웃었던 일이 생각나서 오늘도 날 생각하며 미소를 머금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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