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지도와 친하지 않았다. 간단한 지도 정도는 괜찮은데, 등고선이 나오기 시작하면 더욱 울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는 똑같은 등고선 문제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 각각 나왔는데도 두 번 다 틀리는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복습을 안 했으면 덜 억울했을 텐데, 정답에 해당하는 등고선을 눈으로 열심히 외우고도 선지가 섞이니까 또 틀려버렸다. 이렇게 한심한 나였지만 그래도 이제는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여전히 지도가 없으면 길치다. 얼마나 그렇냐면, 역에서 어딘가 새로운 장소에 가면, 볼일이 끝나고 다시 역으로 돌아갈 때 또 지도 어플을 켜야 한다. 조도나 붐비는 정도가 달라지면 더욱 영문을 모르겠다. 그래도 이젠 들고다닐 수 있는 지도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지도가 없을 때, 우장산역에서 고등학교를 찾아가는 길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졌다. 당시 남자친구가 학교에 찾아올 일이 있었는데, 내가 길을 찾는 방식대로 설명을 했더니 다음과 같았다. "일단 4번 출구로 나와. 그리고 조금만 걸으면 카페가 있거든? ㅇㅇ카페를 돌아서 왼쪽으로 꺾어서 골목으로 들어가. 그러면 ㅁㅁ 문구점이 보여. 문구점 다음에는 XX 분식집이 있거든. 그 분식집을 기준으로 열 걸음 정도 더 간 다음에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꺾어. 그러면 빵집이 보일 거야. (후략)" 가게를 스무 개쯤 나열한 내 설명을 읽고 Y는 도대체 뭐 이런 가혹한 등굣길이 있나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4번 출구로 두려운 마음을 안고 나가 보니 내가 말한 가게는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그는 어렵지 않게 우리 학교를 찾아올 수 있었다. Y는 무슨 설명을 그렇게 했냐고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얼굴이 새빨개져선 대답했다. "나는 그렇게 말해줘야 길을 찾아."
어른이 될 무렵에는 길치 셋으로만 이루어진 친구들 모임이 있었다. 약속 날에는 늘 카카오톡 채팅방에 불이 났다. 어디야, 나 길 잃었어 미안, 금방 갈게, 걱정 마, 나도 헤매는 중. 뭐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 셋이서 같이 역에서 모여서 출발한다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는 셋이 다같이 길을 잃었다. 2013년엔가, 우리를 위한 노래가 나왔다. 우리는 아이유의 '분홍신' 첫 가사인 '길을 잃었다 어딜 가야 할까'로 카톡방 이름을 바꿨다. 우리는 모두 글을 놓고 못 읽는, 까만 건 글씨고 흰 건 종이라고 하는 사람들 같았다.
그러다 길 찾기가 생존에 직결될 일이 생겼다. 혼자서 유럽여행을 가게 된 것이었다. 빡빡한 일정은 없었지만, 해가 지기 전에 숙소를 찾아야 했고 기차를 놓치기 전에 역에 도착해야 했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정에서 뜻밖에 지도를 읽게 된 날이 있다. 나는 로마에서 폼피라는 티라미수 맛집을 찾고 있었다.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티라미수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해서 꼭 먹고 싶었다. 문제는 지도를 보면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가게가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화면을 뚫어져라 보면서, 실제의 세상과 2차원의 기호를 비교하려 애쓰면서, 같은 골목을 열 번도 넘게 뺑뺑 돌았다. 시간은 40분이 넘게 흘렀고 선선한 4월이었으나 곤혹스러워서 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때 갑자기 보이지 않던 폼피의 간판이 눈에 번뜩 띄었다(알고 보니 난 가게를 다섯 번도 넘게 지나쳤다. 한국 간판의 과도하다시피한 가독성에 익숙해진 내가 'pompi'라는 조그마한 글자를 무시했을 뿐). 그리고 열 바퀴도 넘게 같은 자리를 돌았던 덕분에 주변 지리에 대해서만큼은 박사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문득 어떻게 3차원의 세상이 2차원의 평면에 그려졌는지 급작스러운 구조화가 이루어졌다. 문맹을 탈출하면 그런 기분일까. 이제 두려울 지도가 없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폼피에 입성하여 딸기 티라미수를 사고, 헤맬 때 봐둔 공원에 들고 가서 거만한 자세로 티라미수를 먹었다.
원래 지도를 잘 보고 길을 잘 찾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겨우 한글을 깨쳤다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양 들뜬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아직도 지도를 제대로 보려면 내가 보고 있는 방향에 맞추어 스마트폰을 뱅글뱅글 돌려야 한다. 그리고 아직도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운전을 못 한다. 어쩌다 만짱이 조수석에 앉아서, '그리로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빠져서 n번 국도를 타' 같은 말을 하면 입을 막아버리고 싶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길치들의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어떻게든 지도를 볼 줄 알게는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