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59_ 헤어질 결심의 공식

by 벼르

세상엔 요란한 이별도 많겠지만 '헤어질 결심'이라는 표현은 어쩐지 담담한 이별에 더 어울린다. 잔잔하고 담백한, 그러나 그 결심까지 이르는 과정은 결코 고요하지만은 않은 그런 여정 같은 이별 말이다. 헤어질 결심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별은 흐르던 사랑을 단숨에 뚝 잘라버리는 형태가 아니다. 때로는 한 사람의, 때로는 두 사람 모두의 고민과 관계에 대한 성찰에 뒤이은 결과다.


한 사람만의 결정인 경우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헤어지려는 사람이 A, 이별을 통보받는 사람이 B라고 할 때 먼저 A가 B와의 관계로 인해 불행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상황이 있다. 이런 경우 A는 원래 B와의 관계가 행복하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최면이 풀리고, 사실 B와의 관계가 본인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관계는 깊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면 A는 선택해야 한다. 다시 스스로 행복하다는 주문을 걸어 최면 상태로 돌입할 것인지, 아니면 안정된 상황을 뒤흔들어서라도 진정으로 행복한 길을 찾아나갈 것인지. 나는 A의 상황에 처해본 일이 있다. 행복하려면 B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함에도, 헤어질 결심까지 가기가 참 어려웠다. 이별이 나에게만 지진이라면 차라리 나의 마음의 흔들림만 감수하면 되는데, 상대방의 세상까지 흔들릴 게 빤하니까 더욱 그렇다.


반대로 A가 B를 괴롭게 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상대방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상대방이 내 옆에 있는 이유는 오로지 이타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또는 B를 괴롭게 할 것임이 분명한 미래만이 그려질 때. 예를 들어 드라마나,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에 종종 등장하는 불치병 환자의 사례 말이다. A는 불치병을 선고받고 B에게 병에 대해 알리지 않은 채 이별을 고한다. 자신의 육체는 곧 시들 것이며, 시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B가 괴로워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타적인 이별을 현실에서 잘 본 적은 없지만, 전해듣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B는 영문을 모른 채 상대방이 그저 자신에게 마음이 식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알 권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A가 너무하다고, B의 선택지를 무시한 처사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이타적인 헤어질 결심은 아무나 못 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A와 B가 동시에, 또는 비슷한 시기에 헤어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대화를 통해 헤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다. 우리는 서로를 행복하게 하고 있는가, 우리의 사랑은 아직 유효한가에 관한 두 사람의 심도 있는 대화를 통해 사랑만을 말하던 연인은 처음으로 이별을 논한다. 이 대화가 반드시 이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별이 서로에게 미칠 영향, 지금의 상황이 나아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 서로가 서로에게 가지는 의미 등을 모두 포괄하는 대화를 거치다보면 역시 우리는 함께하는 쪽이 맞겠다는 결론을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헤어지지 않는 결론이 나더라도, 두 사람이 한때 헤어질 결심을 했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고, 그 대화 이후의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나쁜 쪽으로건 좋은 쪽으로건 말이다. 하지만 헤어질 궁리를 각자 몰래 한 것보다는, 그러한 생각을 터놓고 대화의 장으로 올린 경우가 경험적으로는 훨씬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만약 그런 대화를 통해 정말로 이별에 이르게 된다면, 그야말로 정말 성숙한 어른의 이별이라고 본다.


관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일과, 실제로 내 손으로 관계의 숨통을 끊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일은 다르다. 어떤 맥락이건 후자를 선택하는 데에까지의 사고의 여정은 험난했을 테니, 누군가 헤어질 결심을 한다면 응원하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별글] 58_ 프로 분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