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69_ 여행은 나의 힘

by 벼르

누구에게나 kryptonite(슈퍼맨을 약하게 만드는 물질), 즉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면 나에게는 한국이 다소 그렇다. 내게 애국심이 없는 건 아니다. 나도 역사를 배우면 때로 화가 나거나 벅차오르기도 하고, 국제 대회에서는 늘 한국을 응원하며, 인종 차별을 당하면 화가 난다. 하지만 한국의 문화 중에서 나를 못 견디게 하는 몇 가지가 있고, 그 문화 속에 늘 갇혀 살면 지속적으로 데미지를 받는 기분이 든다. 가끔 해외여행을 통한 디톡싱이 필요하다. 주기적인 디톡싱을 통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 한국에 대한 안 좋은 점에 주목해서 말하면 너무 부정적인 글이 될 테니까, 그보단 서구 문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점에 주목하여 글을 써보려 한다.

사실 난 5월 5일에 출국해서 6일부터 호주의 시드니에 있는데, 그래서 더 한국과 비교될 수도 있다.


1) 인내심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을 때 가장 문화충격을 받았던 부분이다. 사실 서울만 인구 밀도가 높고, 붐비는 줄 알았는데 사실 그렇진 않았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일자리가 몰린 지역엔 사람이 붐볐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밀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아무도 나를 밀지 않는다는 건 꽤나 충격적이었다. 내가 여행 중이라 예민함이 덜해져서 그렇게 느끼는 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결정적인 차이를 느끼게 된 건 프랑스의 어느 성물방에서였다. 나는 아주 작은 묵주를 딱 하나 구매했다. 한국 돈으로 5천원이나 되었을까. 그리고 얼른 계산하고 나가려고 했다. 그렇게 fancy한 성물방에서 그렇게 작은 물건 하나만 구매한 게 조금은 부끄러웠다. 그런데 갑자기 점원이 내가 구매한 물건을 정성스럽게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느리게, 그것도 내 뒤에 아주 긴 줄이 늘어서 있는데 말이다. 내 뒤에는 계산하고자 하는 손님들이 잔뜩 줄서 있었다. 그런데 점원은 그 손님들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줄을 선 손님들도 앞에서 얼마나 걸리건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신경쓰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완전히 한국인 모먼트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자기도 똑같은 서비스를 받을 걸 아니까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앞에 있는 사람에게 뭔가 많은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뒤에 있는 사람이 적은 서비스를 받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시간은 재화고, 재화는 효율적으로 써야 하니까. 프랑스의 그 성물방에서는 나 혼자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지만, 한국의 기념품 가게였더라면 뒤에 있는 손님들도, 점원도 같이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그리고 줄에 있던 누군가가 소리쳤을 것이다. "아, 빨리 좀 해요!" 그리고 나도 점원도 한없이 주눅들었겠지.


2) Smiling at random people :)

아직도 한국인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퉁명스럽고, 서구권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쉽게 웃어주는지 내 안의 미스터리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고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미소를 짓거나, "How's your day?" 묻는 게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부담은 낯설어서 생기는 것일 뿐, 그런 질문을 듣거나 웃는 얼굴을 마주하면 기분이 즉시 좋아지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요소이겠지만, 나에게는 이런 friendly encounter, 친절한 응대가 너무나 중요하다. 관광객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누구의 삶의 질이나 다 괜찮아서 어느 가게에 들어가도 웃는 얼굴의 응대를 받을 수 있는 것. 호주에 있는 내내, 어느 커피 숍에서나 레스토랑에서도 이런 응대를 받았다. 손님이니까 인위적으로 친절하게 대하는 행위가 아닌, 진짜로 행복해서 낯선 이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듯한 응대였다. 오히려 고장난 건 내 쪽이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음식점에 갔다가 "너의 하루는 어때?"와 같은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막상 그런 질문을 받으니까 "Eh? Um.. Good!" 하고는 나의 주문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그런 질문에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대답하는 사람이길 바란다.


3) 효율성은 개나 주라지

나는 효율적이라는 말이 싫다. 정확히 말하면 비효율을 추구한다기보다는, 효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다가 더 중요한 걸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이 싫다. 사실 앞의 두 가지와도 이어지는 것 같다. 외국에 나와서 살고 싶다고 하면 사람들은 해외에서 사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아냐고 한다. 행정 처리도 느리고, 택배는 꿈도 꿀 수 없고, 일을 진행하려고 하면 나와 상관없는 다른 단계에서 막혀버리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재미없고 느린 삶이 딱히 나쁘지 않다. 선천적으로 답답함을 덜 느끼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애초에 사정이 있겠거니 싶어서 왜 답답하지 싶다. 물론 의도적으로 일을 더디게 만들면 나도 화가 나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변수도 그냥 재미있다.

예를 들어서 오늘은 블루마운틴 투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투어에 포함된 Sydney zoo(새로 만들어진 동물원이라고 한다)가 예상 외로 심히 재미있었다. 만약 우리 둘이서만 돌아다니던 중이었다면, 뒤의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동물원에 최대한 오래 남았을 것이다. 분명 가이드님은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을 거라 말했지만 전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 일정은 예정보다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기에, 왜 이렇게 집합 시간을 빠르게 잡았는지 궁금했는데 퇴근 시간을 피하려고 그랬다고 한다. 눈물을 머금고 픽업 버스에 타는 순간까지도, "저희는 짐 가지고 내려서 알아서 숙소로 돌아가도 되나요?"라고 말해도 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도 한국이 얼마나 편한지, 빠른지, 효율적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본성을 거스르는 문화에 살다 보면 가끔은 완전히 새로운 곳에 가서 디톡싱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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