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글] 02_내가 생각하는 집의 의미

콘센트를 꽂을 수 있는 곳

by 벼르

얼마 전 내향인들은 누울 수 있는 곳을 실내로 친다는 말을 들었다. 집에 있어도 손님이 와서 누울 수 없다면 그건 실외라고 한다. 내향성이 나보다 높은 짝꿍에게 진짜냐고 물어봤더니 진짜라고 당연하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손님 앞에서도 기꺼이 누울 수 있는 사람들만 부르고 싶은 마음이지만) 친구들이 와 있어서 내내 앉아만 있더라도 집은 집이지 않나 싶다. 어쨌든, 짝꿍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실내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집이라고 느끼는 공간의 조건이 까다롭다.


bba823dba2d8944aed6ac73793db5921.jpg 자주 개소리하는 쉘든이지만 이 말만큼은 격하게 동의한다.

그런 까다로움 치고는 집의 이데아, 완벽한 집만을 집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지금 당장 집이라고 부를 때 떠오르는 장소만도 네 군데 정도가 있다. 신림에 있는 자취방도, 정선에 있는 지인의 사과 농장도, 목동에 있는 본가도, 서강대에 있는 동아리방도 어떤 의미에서의 집이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겠지만 나에게 집의 가장 큰 의미는 충전이다. 물론 밖에서도 충전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카페나 서점, 음악관 피아노 연습실, 생맥주가 맛있는 술집 등 내가 좋아하고 밖에서도 휴식할 수 있는 장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데는 어디까지나 보조 배터리 같은 개념이다. 보조 배터리는 편리하지만 한계가 있다. 충전이 끝까지 안 될 수도 있고, 배터리 자체가 방전되어 있을 수도 있다. 사람이 꽉 찬 서점이나 옆자리 테이블이 너무 시끄러운 술집, BGM이 마음에 안 드는 카페는 나에게 방전된 보조 배터리 같은 장소이다. 나의 사회성과 체력을 밖에서 전부 다 끌어 쓰고 나면 꼭 집 침대에 누워서 멍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집 침대는 전기가 끊길 일 없는 콘센트처럼 안심되는 충전 장소이다. 위에 언급한 네 군데의 장소는 모두 나를 충전하기 위한 충전기를 꽂을 수 있는 벽 콘센트 같은 곳이다.


또, 집이라 함은 묻지 않고 방문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정선의 사과 농장은 이런 기준으로 보면 살짝 탈락이다. 물론 나와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농장 주인 분은 내가 언제 방문한다 하건 환대해 주시지만, 가끔은 날짜를 잘못 선택하면 다른 손님과 공간을 공유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영 집같지 않다. 집 같은 정선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미리 날짜를 선점해 두고 우리끼리만 있고 싶으니 다른 손님을 받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려야 한다. 정선을 제외하고는 모든 장소가 이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 같다. 불쑥 방문해서 쉬어도 되고, 아무도 왜 왔냐고 묻거나 불편해하지 않는 곳이 내게는 집이다.


다음 조건은 다소 뜬금없지만 요리를 할 수 있는 곳이 곧 집이다. 여행을 가서 숙소를 잡으면, 부엌과 조리 시설이 없는 호텔은 집 같지 않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아파트에 숙소를 잡거나, 펜션을 잡으면 오로지 조리 시설 때문에 기꺼이 숙소를 집이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 가족의 습관 같은 건데, 숙소를 잡아 두고 관광지를 검색하며 '집이랑 가까워?'하고 물으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웃지 않는다. 거창한 요리를 해먹지 않더라도, 라면이라도 끓여먹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집이다(전기포트로 물을 끓여서 만드는 컵라면은 당연히 탈락이다). 이런 조건으로 치면 서강대에 있는 동아리방은 아쉽지만 탈락이다. 집이 아닌 곳에서는 나를 배불리려면 반드시 돈을 주고 음식을 사먹어야 한다는 점이 집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몸의 충전이라는 의미에서 첫 조건과도 이어지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원하는 소리와 향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집이다. 마지막 조건이 가장 어렵다. 기껏해야 신림의 자취방과 본가, 본가는 전부 다도 아니고 내 방에만 해당되는 조건이다. 나는 시각적인 정보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잘 견디는 편이다(텍스트는 예외). 디자인이 별로면 눈이야 감아 버리면 되는데 코나 귀는 닫히지도 않고 맘에 안 드는 소리라고, 이상한 향이라고 계속 내 뇌를 괴롭힌다. 카페에서 이상한 음악이 나오면 당장 일어나서 나가고 싶어지고, 어디에 앉아 있는데 앞 사람 향수가 코에 거슬리면 자리를 뜨고 싶다. 집에서는 좋아하는 향의 미니 향초를 틀어두고 좋아하는 작곡가의 음악을 틀고, 거슬릴 걱정 없이 마음껏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거스러미 같은 자극이 없으니 높아지는 집중력은 덤이다.


그러고 보면 다들 집에 가고 싶어하는 것 같다. 특히 지치거나 날씨가 별로일 때는 친구들이 집에 가고 싶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집은 하루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 밖에서는 돌아갈 베이스 캠프가 있다는 안심을 한 구석에 품고 집에서 충전한 에너지를 팡팡 쓴다. 아무래도 내가 충전할 곳이 세상에 딱 한 군데밖에 없다면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더 많이 품지 않을까? 집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 군데에 집을 창출해 놓고 베이스 캠프를 전전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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