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이야기
병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신장 조직검사를 받기 위해 입원하던 날 최고조에 달했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동기들과 함께 흰 가운을 펄럭이며 이곳저곳 누비고 다니던 병원이었지만, 이번에는 모든 게 새롭고 낯설게 느껴져 네다섯 발 걷고 두리번거리는 것을 반복했다. 임상실습을 나오면 외래에서는 교수님 옆에 붙어 앉아 환자 차트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병동에서는 배정받은 환자분들을 만나 '학생의사'라고 호기롭게 자기소개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은 그저 엄마가 보호자로 함께 와준 것이 감사하고 가장 든든한 20대 청년일 뿐이었다.
사실 신장 조직검사는 대학병원에서 이루어지는 복잡한 시술과 수술에 비하면 매우 간단한 축에 속한다. 환자가 엎드린 자세로 누우면, 의사가 리도카인으로 국소마취를 하고 초음파로 위치를 보면서 얇은 바늘로 몇 차례 조직을 얻어내면 끝난다. 30분밖에 걸리지 않는 검사지만 입원이 필요한 이유는 출혈의 위험이 있어서 8시간가량 검사부위에 모래주머니를 대고 누워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 혈액 및 소변검사를 통해 출혈이 없으면 대개 다음 날 바로 퇴원할 수 있다.
하지만 과정이 간단하다고 해서 검사를 받는 환자의 마음가짐 역시 가벼운 것은 아니다. 환자가 병동에 입원하게 되면 담당 간호사 선생님이 기본적인 문진과 바이탈을 측정하는데, 내가 심히 긴장하고 있던지라 맥박이 분당 110회 이상, 수축기 혈압이 140 이상으로 나와 여러 번 측정해야 했다.
이후 배정받은 병실에 들어가니 침대 위에 환자복이 놓여 있었다. 와이셔츠, 정장바지와 구두에 흰 가운을 입은 학생의사가 아니라 환자복, 환자팔찌, 슬리퍼 차림을 한 내 모습이 어색해서 세면대 위의 거울을 연신 들여다보기도 했다.
곧 검사실로 데려가주실 이송요원님이 오신다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에 엄마는 내 머리와 손을 붙잡고 기도하시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시험기간이든 아프거나 속상할 때든 항상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주셨는데, 때로는 성가시게 느껴지고 시간이 없어서 이를 거부하기도 했지만 엄마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눈앞에 내가 있든 없든 항상 기도로 나를 키우셨다. 이번에는 나도 절실한 마음에 기도 한 마디마다 진심을 실었다.
검사는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고, 원래는 펠로우 선생님이 하시는 검사지만 교수님께서 외래 진료를 마치신 뒤 직접 해주신 덕분에 더욱 마음이 놓이고 감사했다. 이제 모래주머니를 대고 침대에서 8시간 동안 누워있는 일만 남았는데, 자세도 바꾸지 못한 채 말 그대로 가만히 누워있는 건 생각보다 정말 고역이었다. 처음에는 엄마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시간이 멈춰 선 것처럼 느껴졌다. 중간중간 주치의 선생님이 오셔서 병력청취를 하시거나 담당 간호사 선생님이 내 상태를 확인하셨는데, 누군가가 커튼을 열고 들여다봐줄 때마다 왠지 모르게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저녁에는 친한 동기 몇이 병문안을 왔다.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오지 말라고 할까 고민했지만 막상 동기들 얼굴을 보니 세상에서 제일 반갑게 느껴졌다. 아픈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좋지 않다며 걱정하는 동기도 있었고, 자기가 수술받았을 때 경험을 토대로 공감해 주거나 기운 내라며 간식을 사 온 동기도 있었다. 표현 방식은 각기 달랐지만 잠시나마 내 두려움을 잊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가족, 의료진,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과 배려 덕분에 나는 그날 밤 편히 잠들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혈액과 소변검사에서 출혈을 시사하는 소견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다.
엄마와 함께 버스를 타고 본가에 내려가면서 뭔가 큰 일을 하나 제쳤다는 이야기를 했다. 신장 수치가 정상화된 것도, 병이 치료된 것도 전혀 아니었지만 큰 산을 넘은 듯한 희망적인 느낌이 희미하게 들었다. 병과의 싸움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