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 Little Women 2019』
작은 아씨들(2019)은 루이자 메이 올컷이 1868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새로울 것 없는 오래된 이야기를 영화가 소설을 뛰어넘었다는 찬사에 호기심으로 보게 된다. 작은 아씨들은 원제는 Little Women이다. 책으로 번역되면서 작은 아씨들이라고 했지만, 소녀(Girl)가 아니라 여성(Women)의 이야기다. (영원히 소녀로 있기를 원했던 것일까?) 인기가 많았던 만큼 영화화된 횟수도 많다. 2019년 판은 그레타 거윅 감독에 기대도 있었다. 여성 감독이기도 했고 다른 시선을 잡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함을 가지고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과거는 붕어빵처럼 정해진 코스가 있었다. 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었다. 말 그대로 자라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한 남자의 아내이자 영원히 종속된 삶으로 마감되는 일종의 남편의 재산이었다. 그래서 우아한 관례로 치장한 결혼이라는 장막을 걷어내면 매매혼의 각종 다양함이 존재할 뿐이었다.
19세기 말 1893년 뉴질랜드에서 최초의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미국만 하더라도 1920년에야 참정권이 인정되었고,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년 전 역사다. 서구 여성의 역사가 동양의 역사와 다른가? 긴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에게 고려가 잠시 평등했다고 위로하나 여성이 정승이나 권력의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던 것은 매한가지다. 존 레넌의 가사에 여성은 세계의 노예라고 했다. 뼈아픈 말이지만 오랜 시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은 근본적으로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왔다.
작은 아씨들을 보면서 주인공 조와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이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전적 작품이기도 하고 막연히 꿈꾸었던 그 당시 이상적인 여성의 삶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영화는 그레타 거윅 감독이 작가가 바라던 여성의 모습을 한 번 더 끄집어내 현대적 해석과 더불어 더 또렷한 캐릭터로 살려냈다.
조는 독립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다채롭게 더 확실하게 살려내고, 얄미운 막내로만 비추던 에이미는 당돌한 생각과 이성적이며 야무진 모습으로, 막연히 온화하고 순종적인 메그는 결혼과 꿈 사이 고민하지만 주체적인 모습을 통해 당시 여성들의 가진 한계적인 삶을 비추면서도 한 걸음씩 옮겨가는 전진을 볼 수 있다. 선한 베스는 병으로 죽게 되지만 타인을 위한 착한 본성과 가족을 위한 깊은 사랑과 배려를 보여준다. 이 네 자매의 성격은 어쩌면 한 여성 안에 다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작은 아씨들은 오래전 소설로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매체 속에서 시대를 달리하며 계속 자라고 있었다.
“여자도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고, 외모만이 아니라 야심과 재능이 있어요.”“여자에게 사랑이 전부라는 말에 신물이 나요. 지긋지긋해요.”라고 조는 말한다. 여자는 매춘이나 부자로 태어나는 것 이외는 돈을 벌 방법이 없고, 혼자는 생계유지나 가족부양이 되지 않는다. 만일 결혼 전에 돈이 있는 여자라도 결혼하면 돈은 남편 소유가 되고 아이를 낳아도 남편 소유가 된다. 사랑하고 살 수 있는 주체적 삶이 아니라 남자로부터 선택받는 수동적 삶만이 있었고 결혼이 아니면 살아갈 길이 없는 폭력적 틀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랑이 자유가 아니라 강요라면, 강요된 것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아주 다른 문제다.
메그가 결혼을 말리는 조를 향해 말한다. “내 꿈이 네 꿈과 다르다고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메그는 사랑을 선택했다. 결혼이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실패와 성공으로 구분되는 때 가난하지만 사랑하고 살겠다고 사랑을 선택했다. 당시로는 실패한 선택이라고 타인들은 말한다. 그러나 어려움과 힘듦은 따르겠지만 자신이 선택했으므로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누리는 기쁨과 신의를 가지게 된다.
막내 에이미는 돈 많은 고모할머니께 잘 보여 그림 공부를 지원받게 된다. 고모할머니는 길들여지지 않는 조보다는 영리하고 눈치 빠른 에이미를 잘 구슬려 부잣집에 시집보내려고 한다. 자신의 재능이 평범함을 알고 실망하지만, 가장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이다. 사교계의 장식품이 될 길을 뻔히 알지만 다른 삶이 없다면 그 안에서 최선이라 생각하는 길을 고민한다. 하지만 마지막 에이미는 부자의 청혼을 거절하고 오랜 시간 사랑해 왔던 조의 연인 로리를 선택한다.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로리는 한량 같은 기질이 있지만, 누구보다 자매들을 존중하고 사랑했던 인물이다. 로리의 고백을 받아들인다.
내가 사랑하고 안 하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여자들이 청혼만 받는 시절. 상대가 적당한 배경과 지위, 매너만 있다면 더 나이가 들기 전 결혼해서 붕어빵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던 시간에 용감하게 혼자 살 것을 선언했던 조. 하지만 두렵고 외롭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자유란 잃기 전엔 그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귀한 가치인지 모른다. 조는 불안한 경계를 외줄 타기 하면서도 자유를 잃는 것은 사랑을 잃는 것보다 더 싫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조는 결국 남자에게 반대로 사랑을 고백하며 떠밀린 결혼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선택한다.
자신과 솔메이트 같았던 로리도 조가 사랑했던 인물이다. 그것은 연인으로 사랑이기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조 안에 있던 분리된 남성성을 사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조가 선택한 사랑은 평화로움보다는 성장할 수 있는 사랑을 선택했다. 아마 독신으로 오랜 시간 아버지에게 가스 라이팅에 가까운 학대 아닌 학대를 당했던 저자 루이자 메이 올컷 내면의 희망을 보는 것 같았다. 현실은 희망으로 끝나버리고 아버지라는 늙은 가부장의 그늘에서 평생 인정 욕구에 매달리는 삶이었을지라도 글 속에서 어린 작가는 아름다운 사랑과 행복한 가족을 꿈꾸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조는 출판사에 글을 팔고 신이 나서 치마를 걷고 환하게 웃으며 뛰어간다. 출판사가 원하는 조건을 그대로 수용했지만, 조는 자신의 힘으로 삶을 살아내고 싶었다. 주인공이 여자면, 반드시 결혼을 시키거나 아니면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출판사 사장의 권고는 영화가 끝나도 여전하지만, 영화의 끝엔 여성의 이름으로 출판하기도 껄끄러웠던 시대에 필명과 익명의 불투명함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힘차게 펜으로 쓴다. 그리고 판권은 자신이 갖겠다고 말하는 조로 성장해 있다. 자기 자신조차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던 여성의 삶에 책은 내가 가질 거라고 말하며 조는 내 삶은 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을 결혼시켜야만 한다면 인세를 더 갖겠다는 흥정을 한다.
“어떤 천성은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단다.” 조의 어머니는 조를 달래며 격려한다. 각자가 사랑하고 사랑받는 주체로 천성대로 자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일 텐데, 하지만 그 천성의 인정과 쓰임은 남자들이 정하고 인정하는 범위 안이었다. 그 범위는 결코 남자들을 뛰어넘는 것은 봐줄 수 없는 벽으로 둘러싸인 역사를 반복해왔다. 여성의 한계를 정해버리는 보이지 않는 견고한 틀은 지금은 사라졌을까?
아파서 누운 셋째 베스에게 조는 말한다. “제발 싸워줘. 얌전히 가면 안 돼.” 어쩌면 모든 여성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남성의 삶이 이러해야 하고 여성의 삶은 이러해야 하는 역할보다 주체적으로 사랑할 자유도 사랑받을 자유도 있음을 말한다. 그것을 선택하고 결정함에 치러야 하는 부당한 사회적 불균형을 세련되게 보여주며 이전 영화에 깔린 남성과 여성의 균형의 추를 더 잘 잡아내었다.
논어에 애지 욕기생(愛之欲其生)이라는 말이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랑이 살고 싶은 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서로를 살리는 길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삶에 타인의 삶을 디딤돌로 만들어 영원히 밟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태어난 본성과 천성을 마음껏 꽃 피우게 서로를 성장시키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한다.
개봉 2020.02.12.
장르 드라마, 멜로/로맨스
국가 미국
러닝타임 135분
감독 그레타 거윅
내 별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