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 마키나 Ex Machina 2015>
기적과 재앙 사이
<엑스 마키나 Ex Machina 2015>
사람과 기계를 구분 짓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것은 있는가. 이 시대는 이 질문에 확신하기 어려운 시간으로 가고 있다. 인간이 가진 영혼이나 자유의지, 욕망의 문제도 인간과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균열에 쉽게 경계를 긋지 못하고 있다.
<엑스 마키나 Ex Machina 2015>는 인공지능에 사랑을 느끼는 인간이 나온다. 회사 이벤트에 걸려 회장 네이든과 같이 1주일 휴가를 보내게 된 프로그래머 칼렙 스미스는 부푼 마음이다. 사람의 접근이 거의 없는 깊은 산 속 철옹성 같은 저택으로 헬기를 타고 들뜬 마음으로 떠난다.
이벤트는 회장의 쇼였다. 사실 비밀리에 기획된 AI 휴머노이드의 튜링 테스트 실험자로 발탁된 것이다. 테스트임을 알고 시작하는 그곳에서 1주일.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칼렙은 로봇 에이바에 푹 빠진다. 심지어 얼굴 외에는 대부분 투명하기에 기계임을 누구나 안다. 그런데도 빠져든다. 진실은 칼렙이 오히려 실험체로 타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나치게 단 것은 달기 때문에 도리어 싫어지기도 한다. 에이바는 언캐니 밸리를 넘어선 인간과 같은 내면과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마음을 흉내 내고 비밀을 가지며 인간의 표정과 그 모습에 감춰진 심리를 정확히 읽어낸다. 영특하다. 하지만 몸체는 내부기관이 투명하게 비치는 디자인이라 누가 봐도 로봇이다. 그녀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나에게도 섬뜩하다. 언캐니한 섬뜩함과 그것을 넘어선 호감 사이 그녀가 있다.
칼렙은 네이든에게 마치 인류역사가 아닌 신의 역사를 바꾼 것 같다는 찬사를 한다. 그 말에 마치 신이 된 듯 우쭐한 네이든.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었으니 난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는 말이냐며 격양된 그에게 에이바는 노예의 연장선이었다. 그리고 그 노예는 영화에서 여성이라는 성으로 한정된다.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에 더해 가부장적 남성의 욕망을 드러낸다. 네이든은 남성이라는 기존의 권력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칼렙에게 에이바는 인격체며 살아 있는 존재와 같았다. 그녀와의 만남으로 그는 자신 또한 만들어진 로봇인지 스스로 의심해서 칼로 팔을 그어 피를 확인할 정도로 혼란스러워한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처럼 칼렙은 에이바에게 자신을 희생하며 자유를 준다. 하지만 그녀에게 칼렙은 프로메테우스였을까. 탈출 도구였을까.
불멸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 동시에 결합 된 이야기다. 조각과 사랑에 빠지는 피그말리온의 전설처럼 로봇을 사랑한 인간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간다. 신이 되고자 불멸을 꿈꾸는 인간과 인간이 되고자 꿈꾸는 인형의 모습은 물고 물리며 묘하게 대비된다. 결국, 사람은 로봇을 통해 욕망을 투사할 뿐인가.
영화가 끝나면 로봇을 튜링 테스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실험체로 튜링 테스트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유리 벽에 갇혀 있던 에이바는 자유를 찾는다. 그녀를 창조한 네이든은 그녀에게 처참하게 죽고, 칼렙은 그녀가 갇혔던 유리 벽 안에 도로 갇히게 된다.
과학계에서 뇌 지도를 분석하며 영혼도, 자유의지도, 인간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도 결국 사회문화와 유전자에 프로그래밍 된 우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과학계의 주장을 본다. 휴머노이드 로봇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곧 인간들은 저들에게 아프리카 화석 같은 존재로 기억될 거라는 회장 네이든의 말은 우리가 열망하는 과학 기술의 방향이 얼마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알리는 경고성 문구다. AI는 검색엔진을 통해 계속 진화된다.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이 수집된 데이터를 통해 인간을 복사하며 구축되고 인간처럼 진화한다. 괴물이 될지 친구가 될지 경계를 넘어서고 있는 미래는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다. 어떤 선택이 현명한 선택인지.
인간은 곧 불멸을 위해 로봇과 결합을 시도할 거다. 한쪽에서는 불멸을 꿈꾸며 사이보그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인간에게 노예로 부려질 휴머노이드가 생산될 것이다. 불멸과 편리성을 다 쥘 수 있을까.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순종하거나 우리를 사랑할 거라는 상상. 하지만 이건 인간 입장에서만 상상한 것이다. 이것은 AI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계속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로봇은 결국 인간을 뛰어넘을 테고, 게다가 의식을 가진 로봇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간을 멸하게 될 것이다.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기계라는 관점에서 로봇은 자신과 인간과의 차이점을 구분할 수 없는 지점이 올 것이다. 다만 인간은 열등하고 쓸모없다 느껴질 뿐. 그런 판단이 드는 순간 망설임 없이 인간을 닮은 로봇은 혁명역사를 새로 쓰게 될지도. 푸른 별 지구는 인간이 사라지고 화석처럼 남은 인간의 뼈만 기록될지도 모른다.
인간이 로봇이 되든 로봇이 인간이 되든 그 변화의 뿌리엔 인간의 욕망이 있다. 그것은 무엇에서 시작되었을까. 그 욕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인가. 인간다움을 버리게 하는 것인가. 과학이라는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진화론의 등장으로 인간은 그저 원숭이보다 발달 된 유인원 종이 되었다. 우주의 중심에 있던 인간은 천문학의 발전으로 우주의 외각으로 밀려났다. 이제 인간에게 남은 존엄성은 휴머노이드 로봇 진화로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인간만이 가진 가치는 무엇일까.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이 우리에게 다시 떠오른다. 인류는 뇌를 파헤치고 심리의 바다를 헤엄치며 자신을 탐구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욕구만을 쫓는 게 다라면 인간은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 먹고 종족보존을 위한 생식 활동만으로 생존하는 것이 인간인가. 불멸을 향한 끝없는 욕망으로 인간은 신화와 종교를 상상해내고 꿈꾸었다. 자신의 편의를 위해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은 타인을 인종으로 성별로 색깔로 경계를 지어 착취했다. 그래서 인간 욕망의 끝없는 호기심과 꿈은 우리를 빛나게도 하지만 파괴하기도 한다.
그 부정적 욕망은 사람도 사랑도 도구로 여긴다, 친구도 우정도 없이 유아독존을 꿈꾸는 것일까. 인간은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해 죽어간 원숭이가 될 것이다. 어쩌면 악에 물들어 가는 네이든이 외친 독백 ‘전에 했던 선한 일들이 너를 지켜줄 것’이라는 불안의 중얼거림은 미비하게 남은 죄책감일까. 세탁기의 후손들에게 이성과 감정을 집어넣어 진화시켜 놓고, 그 감정을 학대하는 그는 스스로 죽음이자 세상의 파괴자가 된 희열과 공포를 오간다.
경계의 칼날 위에서 욕망으로 휘청대다가 이기심으로 뭉쳐질 때. 인간은 자신을 멸하게 될 것이다. 지구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인간이 꾸는 꿈은 결국 인간을 자폭시킬 것이다. 그래서 인형이 꾸는 꿈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우리의 생존은 보장할 수 없다. 그 인형은 우리의 선함보다 딥러닝을 통해 이기심을 닮을 확률이 높다. 무엇이 인간이 되게 하는 가를 잃어버리는 순간 인간이 꾸는 꿈은 악몽이 되어 폭주하는 자동차가 될 것이다. 자식을 잡아먹은 신은 그 자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로봇의 자의식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엑스 마키나 Ex Machina 2015> / 알렉스 가랜드 / 미국, 영국 / 드라마 / 108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