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
마음을 바꾸세요
운명의 사랑
운명적 사랑이 있을까? 사람은 태어날 때 새끼손가락에 하나씩 붉은 실이 메여져 있다고 한다. 그 붉은 실의 한쪽은 자신의 운명적인 상대 새끼손가락으로 이어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드라마<연애 시대>나 영화<너의 이름은>에서 운명의 연인이 등장할 때 붉은 실로 표현되곤 한다. 인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그래서 붉은 실이 연상된다.
동양에서는 자연스럽게 환생이나 전생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말하자면 인생은 일직선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돌고 도는 윤회를 한다. 그것은 억만의 겁의 시간 속에 있다. 불교에 등장하는 겁이라는 시간 단위는 사방 15km 정도 철로 된 성에 1mm~1.5mm 크기의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백 년마다 한 개씩 밖으로 빼내서 그 겨자씨가 다 없어지면 겁이라고 했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겁의 시간이다.
운명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터널 선샤인 2004>에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맛깔나게 표현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화두를 던진다. 사랑했던 두 사람이 아픈 과거를 지우면서 기억이 사라지던 어떤 지점에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기억은 나라는 의식을 구성한다. 그중 핵심기억에 속하는 사랑이라는 카테고리는 그곳에 접속된 운명이 강할수록 깊게 뿌리내린다.
짐 캐리가 연기한 조엘과 케이트 윈슬렛이 분(扮)한 클레멘타인은 이상한 이끌림에 자석처럼 붙는다. 사실 영화의 시작은 현재지만 과거를 지나온 현재로 영화의 마지막과 원을 그리며 이어진다. 둘은 사랑하지만 참으로 다르다. 양극단에 있는 둘은 그 간극(間隙)만큼 간절히 서로를 끌어당기면서도 그 거리만큼 먼 존재들이다.
서로 다르다는 건 생물학적으로도 끌릴 수밖에 없다. 암컷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반대의 유전자를 가진 수컷을 선택한다. 종의 건강함을 위해서인데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반대가 만났다는 것은 자신과 가장 먼 존재라서 자식 유전자의 건강함은 확보했는지 모르지만, 1부터 100까지의 사사건건 다름을 맛보게 될 것을 암시한다.
특별나다는 게 매혹적으로 보여 만난 인연은 강렬하다. 시작은 무의식적 호기심과 색다름이 이어져 아주 유혹적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모습을 상대에게서 본다. 자신은 하고 싶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일들, 내 가장 깊은 욕망을 가진 상대를 보며 무거운 중력의 힘으로 사랑을 향해 낙하한다.
완벽한 퍼즐은 판이한 오목과 볼록의 형태를 가졌을 때 합쳐진다. 다름이 만나 퍼즐은 맞췄지만, 그들은 아주 먼 존재들이다. 연결지점을 만들지 못하면 관계에서는 외계인과 조우(遭遇)한 느낌이다. 사랑의 달콤한 기간이 지나면, 정확히 사랑했던 그 모습이 일거수일투족 거슬리게 된다. 상대의 마음이 변했을까? 진실은, 그 사람이 바뀌었다기보다 정확히는 사랑에 심드렁해진 내 마음이 변한 것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사랑했다. 한쪽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나 느낌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평범하고 소심한 남자다. 다른 쪽은 말이 많고 감정적이라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친밀함을 느낄 수 없는 천방지축 발랄한 여자다. 치부조차 털어놓을 때 가깝게 느끼는 그런 여자에게 남자는 계속 떠들어야 마음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성적이지만 차가운 태도로 여자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삶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으로 규정되며 이런 상호작용은 주로 말을 통해 확립된다.”라고 했는데 조엘은 말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사랑할 때는 다 좋았다. 좀 속상한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의 특별한 점이라 생각하면 되었다. 사랑이 흔들리고 느슨해지고 믿음이 약해질 때 다르다는 건 갈등을 증폭시킨다. 이해보다는 싸움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작은 충격에도 부서지고 만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싸움의 끝에 기억을 지워주는 라쿠나 연구소에서 서로의 기억을 지우게 된다. 조엘은 자신을 모른척하며 바로 앞에서 새 애인과 키스하는 클레멘타인을 어이없어하다가 그녀가 자신의 기억을 지운 걸 뒤늦게 알게 된다. 시작은 여자가 했지만, 자신도 동참하러 연구소에 가면서 이야기는 조엘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두 사람이 사랑했던 과거로 간다.
과거로 가는 중에 영화 시작에 처음 만났다고 생각한 파란 머리 클레멘타인은 사실 오랜 시간 동안 너무나 사랑하고, 미워했던 연인이었음이 드러난다. 사랑을 시작할 때 봄의 새싹처럼 등장했던 초록색 머리를 한 클레멘타인. 사랑이 무르익고 완연할 때 햇살같이 환한 오렌지색 머리칼이었던 그녀는 사랑의 기억을 도려내고 푸른색으로 염색하며 차갑게 식어 간 모습이었다. 먼 과거로 간 이야기는 현재로 거슬러 오고 끝은 처음과 만난다.
미셸 공드리 감독은 조엘의 기억을 마술적 배경으로 표현하고 있다. 독특한 연출로 살려낸 기억 속 사랑의 모습은 SF적 상상력이 덧붙여진다. 미술팀이 장인의 솜씨를 발휘하며 머릿속 상상을 구현한 것을 보는 재미도 있는 영화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조엘은 자신에게 간절했던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된다. 사랑이 변하기 전 어떻게 사랑이 시작되었나를 기억해 낸 지점에서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된 그는 기억삭제를 거부하고 저항하게 된다. 사라지고 있는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의 손을 잡고 그녀를 놓치기 싫어서 더 깊은 기억 속으로 도망간다. 그 몸부림 중에 미움의 크기만큼 사랑했던 사람의 존재를 강렬히 떠올린다.
지워지는 기억 속으로 달리는 두 주인공을 보면서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라고 라쿠나 연구소 직원 매리가 한 말이 생각났다. 니체의 말이다. 좋았던 기억만 남기고 아픈 기억이나 부끄러웠던 기억을 지우고 싶을 때가 있다. 아마 미래에 뇌지도가 완성되면 이런 상상이 실제로 실현될 수도 있다. 망각이 복을 가져온다는 것은 달콤한 유혹 같다. 하지만 실수조차 잊게 되었을 때는 그 실수로부터 배울 수 없으므로 고통은 반복된다. 매리가 직장 상사 유부남과 아픈 사랑을 다시 반복하는 것은 실수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잊는다는 게 결코 해결일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르게 생각하기
나 또한 결혼하고 몇 년 후, 서로가 너무 달라 부딪히며 버그러지고 바스러진 때가 있었다. 그의 섬세한 세심함은 집요한 치밀함으로 변했고, 나의 털털한 편안함은 막무가내로 변했다. 그의 침착하고 배려하는 태도는 회피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나의 용감하고 분명한 태도는 공격적인 날카로움으로 변했던 시간이 있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두껍고 높은 벽처럼 느껴졌다. 서로가 반대라 다르게 생각하면 바로 앞에 자신을 돌아볼 참고서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그땐 몰랐다.
반대의 성향은 합일하기 힘든 지점이 있다. 하지만 좋은 거울을 가진 셈이다. 자기성찰로 가는 길은 가장 취약한 부분을 채워 성장시키는 게 시작이다. 그것은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 상대에게는 강점이라는 말이다. 그 부분을 자발적으로 배워간다면 내면과 외면의 성장을 돕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반대가 만났다는 것은 눈앞에 맞춤 교과서가 있는 셈이다. 내게 없는 부분이라 이질적이지만, 서로가 상대를 긍정적으로 인정한다면 두 연인은 완벽한 한 쌍이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서로 달라서 힘들었을까.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몇 년 전 우울증이 와서 힘든 시기가 있었다. 정말 늪에 빠진 듯 보이지 않는 우울과의 싸움은 사람을 지치게 했다. 1년 가까이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지만,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반복된 결과에 적잖이 낙담하던 때. 전년도에 호기심에 등록했던 전생 리딩 상담소에서 연락을 받았다. 상담이 밀려 1년은 걸릴 거라는 말에 반신반의한 심정으로 등록했었다가 잊고 있던 어느 날, 정말 1년이 지난 시점에 연락이 온 것이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나는 그곳에 가게 된다. 이상한 체험이었다. 전생 리딩은 책을 읽듯 나를 읽어내는 사람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을 읽어낸다는 것인데 정말 읽어냈는지는 알 수 없다. 평소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하던 내가 여기에 앉게 될 줄은 몰랐기에 전생 리딩을 받고 나서도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던 시간에 만난 뜬금없는 시도는 묘한 해방감을 가져왔다. 인생 별거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담 중에 내가 소멸해야 할 카르마가 뭔지 물었다. 이번 생에 내가 해야 할 숙제를 물은 것이었는데 뜻밖에 대답이 나왔다. 리딩의 결과는 지금의 남편이 내 전생에 애틋하게 사랑했던 연인이었고, 간절한 사랑이 인연을 다시 이었다고 했다. 다시 만나 감사함을 갚고, 따뜻하게 안아주기 위해 부부인연으로 만났다는 설명이었다.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전생을 읊어주는 그녀 앞에서 솔직히 내 마음은 믿거나 말거나였다.
집으로 돌아와 헛짓거리에 돈을 쓴 후라 은근히 죄책감에 저녁을 더 정성스럽게 차리고 남편을 기다렸다. 바깥출입을 통하지 않던 내가 바깥에 다녀왔다고 하니 잘했다며 웃는 그 사람을 자꾸 쳐다봤다. 그때 그렇게 소중했던 그 여인이 남편이 되었다고? 잘 삐지고, 화가 나면 말 안 하고, 작은 일에 세세히 따지는 그를 향해 ‘넌 도대체 남자가 아닌 것 같아. 여자도 안 할 짓을 하고 있어. 네가 여자야?’라고 종종 몰아붙이던 말이 생각났다. 잠자리에 돌아누운 그를 보며 혼자 속으로 상상했다. 여자였군. 역시, 하면서 몰래 웃었다.
우린 어쩜 그 간절한 인연의 끈을 다시 만나 숙제 중인지도 모른다. 다르다는 것은 부딪힘이 많다는 뜻도 되지만, 달리 말하면 힘을 합쳤을 때 무적이라는 뜻도 있다. 다만 상대를 내 기준에 바꾸려고 하면 어긋나버리는 위험이 있다. 사람은 스스로 변화는 가능하지만, 사랑하는 상대를 내 맘대로 바꿀 수는 없다. 사람들은 자신은 변하지 않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상대의 이런 점, 요런 점을 입맛대로 재단하고 바꾸고 싶어 한다. 하지만 타인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다. 변했다는 그 사람은 어쩌면 그대로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모습을 내 마음대로 상상하고, 멋대로 오해했는지도 모른다. 일갈하면, 그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 내가 오해한 사랑에 실망한 내 마음이 변했을 뿐이다.
다시 마음을 바꾼다면, 사랑의 햇살은 구름 사이로 아름답게 비출 거다. 영화 속 노래처럼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하나하나씩 배워가는 존재다. 여전히 서툴지만, 조금씩 변한다. 매일 실수하지만, 한 발씩 걸을 것이다. 그가 내게 온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면, 나 또한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기억에도 없는 슬픔에 혼란스러워하다 자신들이 지운 과거를 테이프로 돌려받고 다시 만난 조엘과 클레멘타인. 운명의 연인들은 말한다. 도망갈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으니 ‘Enjoy It’ 그냥 즐기자고. ‘너 없이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라고 말하는 운명의 사랑이다. 다시 돌아온 원점인 것 같다. 하지만 회귀한 인연으로 사랑은 마음뿐 아니라 몸에 각인 되어 둘은 내면적으로 성장했으리라 본다. 고통의 지대를 통과했기에 더 크게 열리는 세계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가장 큰 배움은 눈앞에 있었다.
마음을 바꾸세요.
주위를 둘러보세요
마음을 바꾸세요
놀라게 될 거에요
따뜻한 햇볕처럼
당신의 사랑이 필요해요
모두 언젠간 배워요
- <Everybody's Got To Learn Sometime 중에서>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5> / 미셸 공드리 / 드라마, 로맨스, SF/ 미국 / 107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