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26
시간은 간다. 사람들은 보통 시간이 일정한 속도로 간다고 인식한다. 나는 이 시간을 느리게 가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그 앞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이러고 있으면 면이 익는 데 걸리는 3~4분이 지독히도 천천히 흐른다. 속도를 더 낮추고 싶다면 배가 고픈 상태에서 하면 된다. 무엇을 기다리는 마음, 원하는 것을 빨리 이루고 싶은 마음이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술자리가 끝나가
3차로 이동하기 전인데 문자는 (아 진짜 안 온다)
일분 칠분 십분 and 이십분
담배와 애만 태우는 지금
《자니?》다이나믹듀오
여기에서 선택된 네 개의 숫자는 [일]과 [십]의 라임(rhyme)을 맞추려는 의도가 우선이다. 하지만 막연한 기다림이 사람을 얼마나 애태우게 하는지, 또 그 마음이 시계의 숫자를 얼마나 더디게 하는지가 잘 표현되고 있다. 6시 퇴근이라면 5시부터는 분명히 시간이 잘 안 간다. 시곗바늘도 하루 일과에 지쳤는지 영 힘이 달리고, 디지털 시계의 5:59는 마지막 끝판왕처럼 퇴근길을 막고 있다. 기업의 회장님부터 마을의 어르신까지 이른 바 높으신 분들의 말씀을 듣는 시간도 더디게 간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아침조회 때 운동장에 도열해서 듣던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 군대에서도 시간이 잘 가지 않는다고들 한다. 특히 전역 날짜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말년병장들은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냐?"라는 말을 달고 산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시간이 느리게 가는 장면을 자주 본다. 운명의 사랑을 알아보는 순간 두 사람의 시간만 거의 멈춘 듯이 흐르거나, 차 사고가 나는 찰나가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되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이 대표적인 장면들이다.
반대로, 시간이 빠를 때는 언제일까? 모두가 단번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답변은 '놀 때'일 것이다. 일하고 공부하는 시간은 지겹도록 안 가지만, 게임하고 술 마시고 수다 떨고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는 시간은 왜 이리 빠른 걸까? 월급날은 늘 아직 멀었는데 월세, 카드값, 관리비 내는 날은 빨리 돌아온다고도 한다. 이외에도 조카가 훌쩍 컸을 때, 엊그제 입대한 사람이 전역한다고 할 때 등등. 어떤 사람들은 거울을 보다가 갑자기 많아진 주름과 흰머리를 보며 빠른 시간에 야속함을 느끼기도 한다. 아이와 어른이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가 달라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연구결과가 작게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동지(冬至)ㅅ달(아래아)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 황진이
매일 매순간 시계를 들여다보고 사는 현대인들뿐만 아니라 먼 옛날 우리 조상들도 이런 시간의 상대성을 느꼈던 것 같다. 시조에서 느껴지듯 기다림과 만남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간다. 동서고금을 떠나 시간의 속도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모두가 느낀다. 이렇게 빠르게, 또 느리게 제멋대로 가는 시간은 한국어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다가 나는 이런 시간의 상대성이 한국어 단어와 문법에서도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급반에서 시간 관련 단어를 배우는 날이었다. 한 일본인 학생이 나에게 "선생님, 왜 '지난주'는 붙여서 쓰고, '이번 주'와 '다음 주'는 띄어서 써요?"라고 물었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그는 손가락으로 단어를 가리키며 띄어쓰기가 다르다는 것을 나에게 말하려고 했을 뿐이다. 이렇게 한국어로 물어볼 정도면 학원을 다닐 필요가 없다. 참고로 일본어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다.) 그가 가리킨 단어들을 보자.
* 지난주 - 이번 주 - 다음 주
'주'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이레를 일컫는 단어로, 품사는 명사다. '이번'과 '다음'도 명사인데 이들이 앞에 올 경우 한 단어로 보지 않고 '이번 주', '다음 주'로 띄어서 쓴다. '지난주'에서 보이는 '지난'은 '시간이 흘러 그 시기에서 벗어나다'는 뜻의 동사로, 기본형은 '지나다'다. 여기에 동작이 과거에 일어난 것을 나타내는 관형사형 어미인 '-(으)ㄴ'을 붙인 '지난'이 '주'를 수식하고 있다. 사실 한국어 문법을 그대로 따르자면 '지난 주'로 띄어서 쓰는 게 맞겠지만 표준어는 분명히 '지난주'다. 이 학생처럼 궁금했던 누가 국립국어원 상담코너인 <온라인가나다>에 질문했고, 아래와 같은 답이 달려 있었다.
'지나다'는 '시간이 흘러 그 시기에서 벗어나다'의 의미인데 '지난주'는 '이 주의 바로 앞의 주'를 의미합니
다. '지난주'의 '지난'은 '어떤 시기를 벗어나다'의 의미가 아니라 '바로 전'의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에 의미
가 달리 쓰이면서 굳어진 표현으로 보는 것입니다.
결론은 ''바로 전(前)'이라는 의미로 달리 쓰이면서 굳어진 표현'이기에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겠다. 나는 바로 의문이 들었다. 어제 신문은 '지난호'가 아니라 '지난 호'가 아닌가? 나는 어제의 날씨를 분명히 '지난날씨'가 아닌 '지난 날씨'로 찾는다. 이들은 바로 전의 것인데도 '지난호'나 '지난날씨'는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 '지난 회의', '지난 여행', '지난 행사' 등등의 단어들은 '지난○○'으로 띄어쓰지 않으면 이상하고 틀린 문법이 되어버린다.
나는 '지난주'처럼 붙여서 쓰는 단어들이 더 있는지 궁금했고 '지난번', '지난날', '지난달', '지난해', '지난밤', '지난봄/여름/가을/겨울'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단어들은 '지난 ○○'으로 띄어서 써도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가능한 문법에 예외를 두지 않는 것이 좋다는 측면에서도 굳이 이들을 붙여서 한 단어로, 표준어로 인정하는 게 오히려 띄어쓰기에 혼란만 부추길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지난의 띄어쓰기를 가려서 사용하고 이것이 굳어졌을까?
나는 이 답을 '시간'에서 찾는다. '지난'과 빈 칸 없이 바로 이어지는 '번, 날, 달, 해, 밤, 봄/여름/가을/겨울'은 모두 시간 관련 단어들이다. (여기에서 '번'은 차례를 뜻하는 단어이긴 하지만, 현실에서 이를 시간으로도 인식할 가능성이 있다.) 나는 문장에 쓰이는, 단어 사이에 있는 틈(띄어쓰기로 생기는 빈 칸)을 여유로 본다. 이 여유의 공간에는 잠깐 멈추거나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이 머문다. 그런데 한국인은 '지난' 뒤에 오는 시간 단어에는 이 틈을 주지 않는다. 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겠다. 한국인은 과거를 말할 때만 "시간이 빠르다"고 하고,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지금은 즐기고 누려야 할 시간이니 빨라서는 안 된다. 미래는 앞으로의 기대가 담긴 시간이기도 하고, 물리적으로도 아직 감각할 수 없는 시간이다. 나는 '지난'을 띄어서 쓰지 않는 위 단어들을 보면서, 입말에서는 그 차이를 알기 어려운 한국인의 시간감각이 공간의 차원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본다.
이는 한글의 특징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우선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언어에서는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없다. 띄어쓰기를 하는 라틴문자 중에서 영어로 예를 들어보자. 시간의 상대성은 인간의 보편적 감각이기에 영어권 사람들이라고 다를 건 없을 테니, 그들이 last week를 lastweek로 쓴다고 해 보자. 그러나 나는 이런 가정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주'와 '지난주'는 띄어쓰기 여부가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영어는 그렇지 않다. lasttime, lastmonth, lastyear, lastspring, ... 에서 보듯 알파벳은 띄어쓰기에 훨씬 민감한 문자로, 한글에 비해 가독성이 떨어지고 불편해진다.
* 월화수목금토일 - 월화수목금퇼 - 워얼화아수우모옥금퇼
* 노력 - 노오력 - 노오오력 - 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력
한글은 띄어쓰기뿐 아니라 글자를 늘이고 줄임으로써 시간의 빠르고 느림을 표현하는 데 특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월화수목금토일'이라는 7개의 날에는 똑같은 시간이 있다. 주말인 '토일'은 원래 48시간인데 '퇼'에서는 이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주말에 영화 좀 보고, 친구 좀 만나고, 피곤해서 잠 좀 잤을 뿐인데 이틀이 하루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퇼'은 '토'에 받침이 없고, '일'이 모음으로 시작하기에 가능한 단어다. 만약 주말에 해당하는 요일이 '월화'나 '수목'이나 '금토'였다면, 아무리 말을 잘 줄여내는 한국인이라도 이들을 한 글자로 써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퇼'은 한국인이 주5일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후에 느끼게 된 주말의 시간이다. 토요일도 일을 했던 그전의 생활에서 이런 단어는 절대 만들어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주4일제가 시행된다면 일주일에 대한 한국인의 시간감각이 달라질 것이고, 또 어떤 새 단어가 나오게 될지 궁금하다.
반대로 글자를 늘이면 시간이 느리게 간다. '워얼화아수우모옥'처럼 글자에 있는 모음을 더 쓰면 된다. 이걸 읽어보면 정말로 8일 뒤에나 금요일이 올 것 같은 우울감이 몰려든다. 방탄소년단의 <뱁새>라는 노래에서 모든 걸 다 갖고 누리며 사는 황새가 자신을 쫓아오지 못하는 뱁새에게 노력을 하라고 타령을 한다. 노랫말에는 '노력'이라고 써 있지만 실제 노래에서는 '노오오력'으로 늘여서 부른다. 사전에서는 노력을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하여 애를 씀'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들이는 힘이나 에너지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노력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개념이다. 노력보다 노오력에, 노오력보다 노오오력에, 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력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노(오×∞)력'의 시간은 길기도 길지만 그 속도는 말도 못하게 느리다는 걸 한국인은 잘 알고 있다. 참고 견디며 버티는 지금 이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다. 그 시간을 빠르게 만드는 방법은 하나, 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력을 과거로 만드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