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의 시간은 제멋대로 간다 (1)

한국인의 국어생활 25

by 집우주

지금 영어 듣기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해 보자. 음... 생각만으로 싫을 수도 있겠지만 이번 글을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자, 스피커를 켜자. 스마트폰으로 스트리밍을 해도 되고, 어학 MP3도 괜찮다. 오랜만에 학창시절이 떠오르는 사람이라면 장롱이나 서랍 한 구석에 고이 넣어 둔 CDP나 카세트테이프를 꺼내도 좋다. 다만 TV나 라디오는 안 되니, 혹시 EBS 교육방송이나 단파 라디오에 흘러 나오던 미국 방송으로 영어공부를 했던 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을 드린다. 어쨌든 준비가 됐다면 재생 버튼(▶)을 눌러보자.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

I'm OK. Thanks.


정지. 잘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영어 듣기 실력을 테스트하려는 게 아니니, 제대로 못 들었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어쨌든 여러 번 반복하는 듣기로 손해볼 일은 없을 테니 대화를 다시 한번 들어보자. 되감기 버튼(◀◀)을 눌러서 대화의 첫 문장이 시작되기 전으로 가면 된다. 자, 이번에 하려는 이야기는 이거다. 이때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가는가? 앞으로, 아니면 뒤로?


어릴 적, 나는 스포츠 뉴스에 나오는 '연패'라는 단어가 '연달아 지다(連敗)'인지 '연달아 우승하다(連霸)'인지 늘 헷갈렸다. 이는 언론에서 한글 전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한자를 쓰지 않게 된 데서 생기게 된 문제로, 그 내용을 보고 들어야만 어느 쪽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나를 오래도록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게 바로 되감기◀◀의 방향이었다. 위의 대화가 10초동안 나온다고 가정해 보자. 재생 버튼의 방향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으니 0:00에서 0:10로 가는 방향은 분명히 '앞'이 맞을 것이다. 정말 다행히도, 나는 너무 늦지 않게 빨리감기(▶▶)로 번역된 FF가 'Fast Forward'의 약어(略語)이고, forward의 뜻이 '앞으로'라는 걸 알게 되었다. RW(Rewind)와 되감기(◀◀)의 'Re-, 되-'에는 '도로 돌아간다, 되돌린다'는 의미가 있으니 이 단어들이 가는 방향이 '앞'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국어에서 지나간 시간을 가리켜 '앞'이라고도 하니, 대화가 끝난 0:10에서 0:00으로 돌아가는 것도 '앞으로 간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경험을 나만이 아닌 우리가 함께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다. 사전을 찾아봤더니 이 혼란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 앞 ;

③ 이미 지나간 시간.

- 우리는 앞에 간 사람들보다 먼저 도착하였다.

- 우리는 앞 세대 분들의 글에서 누적된 경험을 존중해야 한다.

④ 장차 올 시간.

- 앞으로 다가올 미래.

- 앞을 내다보다.


<표준국어대사전>


흔히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분류한다. 이에 따르면, ③은 과거이고 ④는 미래다. 앞이라는 단어 하나가 교차나 중첩 없이 완전히 반대에 놓여 있는 시간을 다 담고 있는 것이다. 함께 실린 예문을 읽어보면 우리의 잘못이 아닌 게 확실해진다. 그러니 여기에서 오는 혼란은 음성 파일의 재생뿐만이 아니라 동영상을 시청하는 현장과 편집 작업실 등 우리 삶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앞으로 돌려 봐! 아니, 반대로!"


앞은 원래 공간을 가리키는 단어로, '향하고 있는 쪽이나 곳'이라는 풀이가 기본 의미다. 인간을 기준으로 본다면, 얼굴이 있는 쪽이 앞이다. 다만 한국인이 이 단어를 시간에 가져와 쓸 때 문제가 생긴다. 해답이 될 수 있는 결론부터 말하면, 이 원인은 앞이 '시간(time)'과 '순서(timecode)'에 모두 쓰이는 데 있다. 위의 사전에서 ③을 순서, ④를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혼돈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 이 둘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어에서 '시간의 얼굴'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어뿐 아니라 모든 언어가 그럴 것이다.) 한국인이 "시간이 간다"고 말할 때 감각하는 방향은 분명히 앞이다. 일상적인 표현에 미래의 날로 나아가는 '앞으로(from now)'라는 표현은 있지만 '뒤로'는 없다. 타임머신이라도 타지 않는 이상 시간은 절대로 뒤로 갈 수 없다. 하지만 '순서'는 한쪽 방향으로 가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과는 관계가 없는 개념이다. 음성, 동영상 같은 파일은 재생 시간이 일정한 간격으로 일련의 숫자가 생성되는 부호/타임코드(timecode)를 가지게 된다. 위 영어 대화를 재생할 때 나오는 0:00~0:10까지의 숫자 말이다. 음성이 나오는 길이인 10초를 하나의 이야기 뭉치(sequence)로 본다면, 그 안에 있는 문장 세 개에 순서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순서에서의 앞은 분명히 처음을 가리킨다. 그러니 ③에서 '이미 지나간 시간'으로서의 앞은 '지금, 요즘, 현재와 비교할 때 먼저 일어난 일'인 순서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게 맞을 것이다.


* 과거 - 미래

{시간} ㉠ 뒷날 - ㉡ 앞날

{순서} ㉢ 앞날 - ㉣ 뒷날


그런데 앞에 날(day)을 더해 단어를 만들어 보면 또 한번 멘붕인 온다. 앞날(㉡)뿐 아니라 앞의 반대말인 뒤가 쓰인 뒷날(㉣)도 미래를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자, 집중하고 핵심을 보자. 휩쓸리지 말고 태풍의 눈으로 들어가 보면 오히려 이 단어들은 시간과 순서라는 두 개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앞날(㉡)은 인간이 감각하는 '일방향으로 가는 시간'의 개념에서 만들어졌기에 뒷날(㉠)이라는 단어는 없다. 그러나 순서에서 뒷날(㉣)은 이미 일어난 어떤 사건 이후에 생길 다른 일과의 연관성이나 인과 관계를 강조할 때 가능하다. '뒷날을 기약하다/도모하다' 등의 표현은 어떤 일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나중에 관련된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순서에서 앞날(㉢)은 '이전의 어느 날, 또는 얼마 전'이라는 의미로 문학 작품에서 쓰인 예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일상 대화에서는 과거의 날을 뜻하는 의미로 앞날(㉢)이 쓰이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아마 앞날(㉡)과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한국인들이 의식적으로 피해온 게 관습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한국어에서 앞은 과거도 될 수 있고, 미래도 될 수 있다. 언뜻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엉킨 것을 잘 풀어내 보면 어떻게 이게 말이 되는지 논리적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번에는 시간의 방향에 대해서 다뤄봤다. 그러나 제멋대로 가는 한국어의 시간 단어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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