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과 일과 절, 그리고 데이 (2)

한국인의 국어생활 32

by 집우주

앞서 같은 한글을 쓰면서도 날, 일, 절의 사용에 차이를 보이는 우리나라와 북한의 기념일 명칭에 대해 알아봤다. 또 한자문화권인 주변 국가들이 日(일)과 節(절)을 다르게 쓰고 있는 것도 살펴봤다. 그렇다면 전 세계가 함께 기념하는 날이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영어} Earth Day

{한국어} 지구의 날

{중국어} (世界)地球日

{일본어} 地球の日 / アースデー


Earth Day[어쓰 데이]는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기름유출 사고를 계기로 지구를 깨끗이 만들어 가자는 뜻에서 그 다음해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사고가 있었던 만큼 환경문제는 단순히 어느 특정 국가만의 일이 아니기에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4월 22일을 기념하고 있다. Earth Day는 한국어로 '지구의 날'이다. 한국에서는 특정 집단이나 분야의 비공식 기념일을 보통 '□□의 날' 형식으로 이름을 짓는다. '스승의 날, 성년의 날, 국군의 날, 장애인의 날, 과학의 날, 법의 날'처럼 말이다. Earth는 지구(地球)인데 이는 한자어이긴 하지만 대체할 만한 고유어가 없는 단어다. '지구절, 지구일'은 영 이상하고, 글자 날의 특성상 '지구날'로 쓰는 것도 어색하다. (한국인이라서 느낄 수 있지, 외국인은 이렇게 생각하지 못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地球日이다. '纪念日(기념일)'이 들어간 경우를 제외하고 국가의 모든 절일의 끝말에 节(절)을 사용했던 중국이라서 그런지 日(일) 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중국은 旅游日(여행의 날), 学生日(학생의 날), 艾滋病日(에이즈의 날), 博物馆日(박물관의 날)에서 보듯 비공식 기념일에 주로 日을 사용한다. 일본에서는 地球の日이다. 앞선 글에서 이미 현대 일본어는 날을 의미하는 글자로 節을 쓰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일본에서는 축일이든 비공식기념일이든 대부분 '△△の日' 형태로 이름을 짓는다. (アースデー[아스데]는 '어스데이'처럼 영어발음을 가타가나로 적은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일부 기념일에는 day에 해당하는 デー가 쓰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꼭 짚고 갈 게 있다. 地球の日이 우리말로 '지구의 날'이라고 해서 の[노]가 격조사 '의'에 대응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일본어에서는 명사와 명사를 붙일 때 の를 쓰는 게 문법이다. 우리말로 '어린이날'인 こどもの日에서 の를 굳이 직역해 '어린이의 날'로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보면 한국, 중국, 일본 모두의 기념일 명칭에 '○○日(일)'의 형태가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국경일이나 국가기념일 명칭에는 날, 일, 절이 모두 쓰인다. 그런데 기업이나 단체에서 이른 바 '데이 마케팅'을 목적으로 지은 이름에는 주로 절만 사용된다. 이는 앞서 알아본 대로 절이 날/일보다 격과 급이 높은 글자이기에 특별한 인상을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는 이미지를 스페셜하게 만들어 주는 단어가 하나 더 쓰인다. 바로 영어 단어 day를 소리 그대로 적은 '데이'다.


* 절 ; 십일절, 광클절, 경록절, ...

* 데이 ; 발렌타인데이, 빼배로데이, 오이데이, 오리데이, ...


'십일절'은 오픈마켓 11번가에서 진행하는 특별한 이벤트다. 나는 아무 관계도 없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아마 이 이름을 지을 때 '십일날'이나 '십일일'은 후보는커녕 처음부터 거론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날짜를 지칭하는 '10일날, 11일'과 헷갈릴 수 있고 일상적으로 자주 쓰이기 때문이다. '십일데이'도 뭔가 단어끼리 잘 안 맞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슷한 쇼핑 이벤트로 '광클절'이 있다. 광클(光 + click : 빛처럼 빠르게 클릭하다)의 글자 중 '클'이 외래어라서 '광클데이'라고 했을 만도 한데 절을 택한 것이 흥미롭다. 내 생각으로는 이 둘은 아마 중국의 쇼핑 이벤트인 光棍节(광군절), 女王节(여왕절) 같은 이름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경록절'은 크라잉넛 멤버 캡틴 한경록의 생일을 부르는 말이다. 뮤지션들과 함께 놀던 작은 생일파티 자리가 점점 커져 크리스마스, 핼러윈과 함께 홍대 3대 명절 중 하나가 되었다. 글자, 발음, 어감 무엇으로 보나 '경록날, 경록일, 경록데이'보다는 역시 경록절이다.


'데이'는 외국(영어권)의 기념일을 그대로 가져올 때 필요하다. 발렌타인데이(Valentine Day)가 가장 좋은 예다. '발렌타인날, 발렌타인일, 발렌타인절'처럼 영어 단어 day를 한국어 글자로 바꾸면 이상하다. (반면 중국에서는 발렌타인데이를 情人节(정인절)로 부른다.) 데이는 단어가 어렵지 않고, 발음도 쉽고, 매달 14일마다 찾아오는 □□데이, △△데이가 퍼져나가기도 했고, 경상도 사투리처럼 들리기도 해서 그런지 한국인에게 친숙하다. ("왔데이~ 먼데이? 버스데이! 해피 벌스데이"로 이어지는 고전 유머도 있단다.)


그러나 데이는 분명히 날/일/절과 결을 달리한다. 가장 큰 차이점을 꼽자면, 데이는 상품을 구매하게 하려는 상업적 목적의 기념일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가장 성공한 사례로 '빼빼로데이'를 들 수 있을 텐데 일년 365일 중 빼빼로데이에 빼빼로가 제일 많이 팔린다. 그러나 어느 한국인도 이를 '빼빼로의 날'로 부르지 않을 것이고, 이에 동의하지도 않을 것이다. 5월 2일은 '오이데이' 또 '오리데이'다. 이 날은 사람들에게 오이와 오리고기의 효능을 알리고 소비를 촉진하려는 의도가 있다. 오이데이는 '오이일'이나 '오이절'이 될 수 없다. '오리데이'와 '오리의 날'은 완전히 다르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오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리데이'만큼 끔찍한 날이 또 있을까? 데이의 또 다른 특징은 앞 단어에 행동과 관련한 단어가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키스, 허그, 고백 같은 사랑 표현은 모두 데이하고만 어울린다.


날과 일과 절, 그리고 데이는 이처럼 문법과 사용방식에서 다르다. 그런데 한국어에는 기념일에 쓰이는 끝말이 하나 더 있다. 생일(生日)을 높여 부르는 말인 생신(生辰)과 탄신(誕辰)에 쓰인 신(辰)이다. 辰은 태어난 순간의 별자리를 가리키는 글자다. 해가 뜨고 지며 바뀌는 낮밤을 인간과 땅의 관점에서 바라본 게 일(日)이라면, 신(辰)의 별은 인간 영역 밖인 하늘과 우주의 일이다. 어른, 윗사람, 위대한 분을 하늘 같이 모셔왔으니 이 글자가 높임말로 쓰인 이유가 바로 이해가 된다.


* 설날날, 현충일날, 개천절날, 발렌타인데이날, 생신날,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날


마지막으로, 순우리말인 날은 아주 요상한 습관이 있다. 한국인의 입말에서 기념일 명칭이 나오면 자주 그 뒤에 따라 붙는다는 것이다. -일날, -절날, -데이날, -신날은 '역전 앞' 같은 중복표현이다. 심지어 -신일날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글자 3개가 연달아 있다. 우리말이 좋아서 그러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다행히 '-날날'은 없다. 그러고 보니 한국인은 월(月)에도 고유어인 달을 붙여 '1월달'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날은 한자와 영어 단어를 '지구가 한 번 자전하는 동안을 세는 단위'라고 최종적으로 정의하는 친절한 글자다.



** 참고 **

동아닷컴. [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 탄신일, 생일일?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140508/633144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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