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33
대학시절, 친구의 이야기다. 친구는 방송, 언론 쪽으로 진로를 생각했던 터라 스피킹 수업을 신청해서 듣고 있었다. 아나운서 출신 교수님답게 직접 기사를 써 보고, 뉴스 앵커나 기자처럼 멘트를 해 보는 등 실습 위주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아래는 그 수업 중 한 에피소드다. 친구가 발췌해 온 기사를 읽는 차례였다.
친구 : [쏘]주와 삼겹살 등 서민 식품 가격이 크게 올랐습니다. 정부는 ...
교수 : 잠깐만. [쏘]주가 아니라 [소]주지.
친구 :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습관이 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교수 : 평소 습관이 방송에 나오는 거야. 그리고 [쏘]주가 되면 [쌈]겹살도 괜찮겠네?
첫 문장, 아니 첫 단어부터 날카로운 지적을 받는 바람에 친구는 얼굴이 벌개졌고 준비해 온 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뒤 한동안 친구는 술집에서 술을 시킬 때마다 "여기, [소]주 하나요."라며 아주 정성스럽게 '소'를 발음했다. 우리는 이러다가 [살]밥을 먹는 거 아니냐며 놀렸던 기억이 있다. (가끔 부끄러운 자기 이야기를 친구 이야기인 척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건 정말 친구 이야기다.)
교수님은 정확했다. 여기에서 된소리는 불필요하다. 왜 '소'를 [쏘]로 발음하는가? '쏘주'로 쓴 것도 아니고, 첫 글자이기에 앞 글자 받침의 영향을 받거나 사잇소리 현상이 일어날 수도 없다. 한국어의 맞춤법을 샅샅이 뒤져봐도 된소리가 되어야 할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다. (이 글에서 된소리에 대한 문법을 설명하지는 않을 테니 궁금하다면 찾아보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국인은 예사소리 소를 된소리 쏘로 바꾼다. 한국인이라면 잘 알겠지만 된소리는 예사소리보다 느낌이 [세]다. [소]주는 부드럽고 [쏘]주는 쓰다. 한잔 술에 위로받는 인생의 씁쓸함은 안다면 역시 [쏘]주다. 말맛이 다르니 술맛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문법의 측면에서는 아무런 이유나 근거도 없는 된소리를 굳이 발음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입말은 [쏘]주여도 쓸 때는 소주여야 한다. [쏘]주가 솔직하다면 '소'주는 정직하다고 할까?
이제부터 한국인의 입에서 '쓸 데 없이' 된소리로 바뀌는 글자를 알아보자. 현대 한국어에서 자음 ㄲ, ㄸ, ㅃ, ㅆ, ㅉ(쌍기역, 쌍디귿, 쌍비읍, 쌍시옷, 쌍지읒) 다섯 개가 된소리로 발음된다. 뒤집어 생각하면 된소리로 바뀔 수 있는 예사소리 자음은 ㄱ, ㄷ, ㅂ, ㅅ, ㅈ이라는 걸 의미한다. 아래는 [쏘]주처럼 한국인이 단어의 첫음절 초성을 된소리로 발음하는 단어들이다. 빠르게 읽어보자.
고무줄, 고추, 닦다, 볶다, 사나이, 사납다, 소련, 세다, 작다, 좁다, 줄이다, 족집게, ...
아마 다들 예사소리로 잘 읽었을 것이다.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테스트를 하면 당연히 조심하게 된다. 그러나 평소 대화에서도 100%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대화에서 '[쏘]련'을 입에 올릴 일은 없겠다. 예시가 올드하다.) [고]추보다는 [꼬]추가 더 맵다. 대충 [닦]지 말고 제대로 [딲]아야 속이 후련하다. 미용실에서는 머리를 깎고 [뽂]는다. 여름에는 선풍기나 에어컨 바람을 [쎄]게 틀고, 학생들은 시험에 나올 문제를 잘 알려주는 [쪽]집게 선생님을 찾는다. 된소리가 된다고 해서 하나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왠지 뭔가 더 좋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무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눈으로 보는 글자가 아니라 귀로 듣는 소리의 차원에서 한국인에게는 된소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어에서 예사소리보다 강한 느낌을 주는 거센소리(격음)도 있다. 많은 한국인이 '폭발'을 '폭팔'로 쓰거나 폭[팔]로 읽는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코]무줄, [탂]다, [폮]다, [촉]집게'라고 하는 한국인은 없다. 왜 그럴까? 그야 나도 모른다. 그저 된소리로는 하지만, 거센소리로는 안 하는 현상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비유는 해 볼 수 있겠다. 거센소리와 된소리는 구강 내부의 기압이나 발음 기관의 긴장에 차이가 있기에 성질이 다르다. 내 생각에 예사소리가 아메리카노라면, 거기에 샷을 추가한 게 거센소리다. 샷이 두 배인 만큼 맛이 진하고, 효과도 클 것이다. 거센소리는 맛도 향도 세다. 된소리는 에스프레소 도피오다. (에스프레소 2잔을 한 잔에 모은 음료다. 된소리가 나는 쌍자음들은 자음 두 개를 붙여서 쓴다.) 애초에 물을 탄 부드러움이 없다. 걸쭉하고 쫀쫀하게 응축된 진액에 가까운 소리, 한국인의 입에서 된소리가 자꾸 땡기는 건('당기다'로 하면 맛이 없다.) 바로 이 자극적인 맛에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 반드시 단어의 첫 글자 초성만 된소리로 내는 것은 아니다.
㉠ 문과, 이과 / 옷발, 무기발 / 자격증, 면허증
㉡ 대통령감 / 장관급, 에이급 / 감방 / 잡설
밑줄 친 글자는 모두 된소리로 발음된다. 앞 글자의 받침 같은 문법적인 요인과 아무 상관도 없다. 주의할 점은 된소리로 발음하지만 사전에서는 예사소리로 찾아야 한다. ㉠과 ㉡을 나눈 건 글자가 단독으로 쓰이는지 여부다. "그 사람은 [깜]이 안 돼", "너랑 나랑 [끕]이 달라."에서 보듯이 ㉡은 혼자 있을 때도 된소리로 발음한다. 된소리는 이처럼 그 글자가 어떤 뜻인지 알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도저히 그 이유를 모르겠는 경우도 있다.
겉으론 bad girl 속으론 good girl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겉모습만 보면서
한심한 여자로 보는 너의 시선이 난 너무나 웃겨
춤 출 땐 bad girl 사랑은 good girl
춤추는 내 모습을 볼 때는 넋을 놓고 보고서는
끝나니 손가락질하는 그 위선이 난 너무나 웃겨
- <Bad girl, Good girl>, 미쓰에이
미쓰에이는 노랫말에 있는 단어 '시선'과 '위선'의 글자 '선'을 [썬]으로 발음한다. (혹시 이 노래를 모르거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찾아서 확인해 보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이 노래를 들었을 때 '끝나니 손가락질하는 그 '윗선'이 난 너무나 웃겨'인 줄 알았다. 내용상 좀 어색할 수는 있지만 문장이 틀린 것은 아니기에 우리 사회에 수직화되어있는 계급을 비판하는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와 보니,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더 웃기다.) 한국인은 일상 대화에서 '시선'과 '위선'을 [시선]과 [위선]으로 발음한다. 아무리 소리의 높낮이와 길이가 있는 음표 위에 놓인 글자라고 해도 왜 [썬]을 된소리로 강조한 걸까... 뭐, 윗선의 지시라도 있었던 걸까... 나는 모르겠다.
** 참고 **
미디어오늘. <소주가 아니라 ‘쏘주’라고 해야 말맛이 나지>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