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56
한국어 단어에는 순우리말이라고 불리는 고유어뿐 아니라 한자어, 외래어, 외국어가 있다. 이제 시간을 꽤 거슬러 올라가 보자. 중국 한자의 영향을 받기 전, 한국인은 순수한 한국어인 고유어만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다, 섬, 가람, 메/뫼, 사람, 사랑, ... 같은 단어를 글자로 쓰지는 못했지만 말하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옆나라 중국의 영향을 받아 글을 써 보게 되면서 한자를 빌려 쓰게 되었을 것이다. 海(해), 島(도), 江(강), 山(산), 人(인), 愛(애) 같은 한자가 떠오른다. 당시 글자를 배우고 사용할 수 있었던 한국인은 '바다'로 말하고, '海'로 쓰고, '해(중국 발음으로는 [하이: hǎi]다.)'라고 읽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기초 한자 교육을 받는 한국인들은 '바다'와 '해'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두 글자와 소리 사이에는 아무 공통점이나 관계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한자공부를 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두 개의 글자를 연결시키는 일이고, 그래서 그냥 외우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나는 그렇다면 왜 옛날 우리 조상들은 굳이 똑같은 개념을 가진 단어, 글자인 '바다'와 '해' 두 개를 계속 사용했는지 의문이 든다. 앞선 글의 논지로 따진다면 같은 것, 같은 개념을 가리키는 단어가 둘 이상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바다'든 '해'든 둘 중 하나만 사용하고 다른 하나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더 적은 수의 단어만 알아도 되는 쪽으로 효율성을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외국어를 배워 본 사람들은 모두들 잘 알다시피 한국어와 중국어는 다르다. 글자, 단어가 문장 안에서 사용되는 방식, 문법 등등이 다르다. 이런 것들을 전문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한국인은 "바다에 가자."라는 문장을 "해에 가자."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휴가 이야기를 하던 내가 이카루스가 되어버릴 수 있다.) 그러니 '바다'와 '해'라는 단어, 글자가 똑같이 '지구 위에서 육지를 제외한 부분으로 짠물이 괴어 하나로 이어진 넓고 큰 부분'이라는 뜻이라고 해서 둘을 마음대로 바꾸어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오늘날의 '순화어(다듬은말)'로 돌아와 보자. 세계화, 인터넷이 보편화된 오늘날의 상황을 반영하듯 아무래도 이 중에서 최근에 주로 순화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영어가 주를 이루는 외래어와 외국어다. 한국인은 사용할 수 있는 기존 단어가 있는데도 늘 '무분별'라고 '불필요'하게 외래어, 외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왜 굳이 이미 있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외래어, 외국어를 사용하려는 것일까? 물론 그 단어를 정확히 대체할 수 없는 이유가 있기도 하겠지만, '추모공원'보다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가 멋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많은 경우에 '뭔가 있어 보인다'는 효과가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외국에 대한 동경과 그에 따르는 외국어를 안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우월의식이 깔려 있다는 것은 한국인 모두가 느끼고 있다. 당장 우리나라 역사만 봐도 아주 오랫동안 귀족, 지식인만이 한자를 배우고 사용할 수 있었고,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상류층만이 외국 여행을 할 수 있지 않았는가? (그러나 남자들이 '아내' 대신 '와이프'를 쓰는 것을 보면,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당연히 이에 대해서는걱정과 우려, 또 현상에 대한 비판이 따른다. 결코 오늘날의 일만은 아니다.
문 : 요즈음 신문, 잡지들의 '부인란'을 보면 '악쎄싸리'란 외래어를 제목으로 많이 쓰고 있는데
우리나라 언어생활에 익혀지지 않은 말을 뭣 때문에 즐겨 사용하는 것입니까?
만일 우리말로 옮긴다면 뭣이라고 해야 적당할까요?
답 : 사실 흥분하실 만한 일입니다. 외래어 사용을 "멋"으로 하는 사회풍조가 신문, 잡지의 제목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지나친 외래어 사용은 피하도록 노력합니다. "몸치장"이라고나 번역해 볼까요. 본시는 '부속품', '부인 옷의 치장'이란 뜻인데 요새 신문, 잡지 등에서는 '양장모자, 장갑, 구도,
머리치장' 등 '몸치장' 일체를 가리킵니다.
-<'악쎄싸리'와 외래어> 1957년 7월 4일 경향신문
무려 1950년대의 기사다. (혹시나 싶어 짚으면 '악쎄싸리'는 accessory이고, '액세서리'가 현재 규범 표기이다.) 그 당시에도 이미 외래어 사용을 '멋'으로 생각하고 사용 행태를 '지나치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의문이 든다. 정말 '악쎄싸리'를 '몸치장'으로 바꾸어 쓸 수 있을까? 과연 한국인들에게 물어보면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설문 조사를 해 볼 수는 없겠지만 둘을 바꾸어 쓸 수 없다는 대답이 훨씬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귀걸이, 목걸이, 반지, 팔찌, 브로치처럼 치장을 위해 보통 금속으로 만든 작은 장신구 류의 '물건'과 치장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행동'이 서로 대체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말로 해 보는 게 확실하다. '악쎄싸리를 하다'와 '몸치장을 하다'는 결코 문장 안에서 같은 뜻으로 쓰일 수도 없고, 대체될 수도 없다. '악쎄싸리'는 사고 팔 수 있지만, '몸치장'은 그럴 수 없다. '예쁜 악쎄싸리'는 있지만, '예쁜'으로 '몸치장'을 꾸밀 수는 없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악쎄싸리'가 '액세서리'로 모양만 조금 달라진 채로 거의 그대로 살아남아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이미 애초에 쓰이는 방식이 완전히 다른, 이미 사용하고 있는 단어로 다듬어질 수 없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이 제시하는 순화어(다듬은 말)가 사용되지 못하는 이유, 다듬는 방식에서 아쉬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2006년 국립국어원은 '브런치(brunch)'의 우리말 순화어를 '어울참'으로 선정했다. 그로부터 십 여년이 지난 지금, 브런치 대신에 어울참을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 없는 게 아니라 '없다'고 해도 된다.) '끼니 사이에 먹는 음식'이라는 뜻의 '참'과 우리말 소리를 잘 살렸다고 볼 수 있겠지만, '브런치'와 '어울참'은 단독으로만 대체될 뿐 실제로 문장 안에서 바뀔 수가 없기 때문이다. '브런치 카페, 브런치 메뉴, 브런치 세트'의 브런치를 어울참으로 바꿀 수 없다. (이 블로그 서비스 이름도 순화되지 않았다.) 한국인의 입에서 '브런치를 먹다'는 나오지만 '어울참을 먹다'는 영 이상하다. 현대 한국인은 '간식'을 먹지 더 이상 '참'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문장 안에서 완전히 대체될 수 없는 데다가 변화한 시대 상황도 반영하지 못하는 단어가 살아남을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은 스스로 '아점'을 만들었다. ('아점'은 많이 쓰이지만 '속된말'로 정의되어 있다.) 아쉽게도 아점은 카페, 메뉴, 세트 같은 영어 단어와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아점을 먹다'가 가능하기 때문에 한국인의 입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단어 조합의 방식에서도 '아점'이 '브런치'와 더 유사하다.)
나도 한국어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무분별하고 또 불필요하게 한자어, 외래어, 외국어를 사용하기보다는 가능한 순우리말로 말하고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권장하고 싶다. (우리 몸에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하지만 단어는 한국인이 사용하는 문장 안에서 기능하고, 가능 여부가 결정된다. 아무리 뜻이 같고 취지가 좋다고 해서 말할 수 없고 쓸 수 없는 단어를 사용하라고 할 수는 없다. '에어캡(air cap)'은 '뽁뽁이'로 바꾸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한국어에서 심심풀이 오락과 놀이 기능이 추가되었다.) '네티즌(netizen)'을 '누리꾼'으로 써도 문장 안에서 주어와 목적어로 알맞게 쓰인다. '업사이클(upcycle)'과 '새활용'은 '하다'라는 동사에 둘 다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말을 사용하는 게 좋다는 순화어의 취지와 목적이 조금이라도 많은 한국인에게 통하지 않을까?
'치팅데이(cheating day)'는 다이어트(1996년에 '덜 먹기', '식이요법'을 함께 쓸 수 있다고 발표했었다.)를 위해 식단을 관리하고 섭취량을 줄이는 사람들이 한 번 정도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날을 말한다.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자신의 몸을 속이는 것이다. 이것을 한국인은 '먹요일'로 바꾸었다. 동사인 '먹다'의 어간인 '먹-'을 활용해 단어를 만든 것인데 '목요일'과 글자와 소리가 비슷해서 최근에 가장 잘 다듬은 순화어로 꼽힌다.
그러나 잘 만들고 다듬은 단어라고 해서 많은 한국인이 오래도록 사용하고, 그래서 살아남을 거라는 건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 '치팅데이'가 '먹요일'이 되어 살아남으려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의 입과 손에서 사용되어야 하는데 한국인은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에서 '요일'을 빼고 '월, 화, 수, ...'처럼 한 글자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글자 특성상 '먹요일'의 '먹'이라는 한 글자가 이런 쓰임에 완전히 대응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목요일에 하는 회식이나 식사 약속에 '2022.6.16 (먹)'처럼 써 보는 것은 어떨까? 격식없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초대라면 충분히 가능하고, 재미있을 것이다. 또 일주일에 한 번인 치팅데이를 일부러 '목요일'로 정해서 '월화수먹금토일'이라는 일정을 세워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다듬은 말이 널리 쓰였으면 하는 사람들에게도,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