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되고 싶은 막내, 받침 (4)

한국인의 국어생활 12

by 집우주

회화를 목적으로 외국어를 배운다면, 대부분 듣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갓난아기가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따라하며 모국어를 익히듯이, 입이 트이려면 많이 들어야 한다. 언어는 듣지 못하면, 들리지 않으면 결국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은 하루라도 빨리 말을 하고 싶어한다. 그 굴뚝같은 마음을 모르지는 않지만, 나는 이제 막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학생들에게 '나는 말 못하는 아기'라고 생각하고 말하기보다 듣기에 더 집중하라고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선생님을 냉정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나는 무엇보다 발음과 소리에 대한 감각을 기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듣기만 해서도 안 된다. 내가 초급 단계에서 듣기와 더불어 강조하는 것은 단어 공부다. 한글은 소리글자이기에 들리는 대로 쓰는 게 가능하지만 동시에 올바른 맞춤법이 필수로 요구된다. 유독 '말하기-듣기' 연습만 선호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처음에는 잘하고 두드러져 보이지만 곧 실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단어의 소리와 글자, 두 가지를 함께 익히지 않으면 [궁물]을 듣고 '국물'로 쓸 수 없고, 그 반대로 '국물'을 [궁물]로 읽을 수 없다. 이 학생들은 간단한 받아쓰기만 시험만 봐도 '읽기-쓰기'를 소홀히 하는 티가 확 난다.


한국어를 잘 듣고, 잘 말하고, 잘 읽고, 잘 쓰려면 결국 다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자음동화, 비음화, 구개음화, 탈락 등등 복잡한 한국어의 음운변화를 바로바로 이해하고 따라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이번 글의 주제인 받침이 발음되는 '음절 끝소리 규칙'과 '연음(連音)'도 표기와 소리를 헷갈리게 만드는 문법이다.


[빋]

① 빋, 빗, 빘, 빚, 빛, 빝, 빟

② 빗, 빚, 빛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 A가 [빋]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A가 이제 막 한글 자모와 대표받침 소리를 배웠다면 ①처럼 글자 7개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한국어가 어느 정도 유창한 중고급 과정에 있다면 ②처럼 그 수가 3개로 줄어든다. 단어를 많이 알고 맞춤법을 제대로 익히면 오류가 일어나는 경우의 수를 줄여 올바른 답을 맞힐 확률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호응하는 서술어도 없고, 대화의 맥락도 모르기에 '빗, 빚, 빛' 중에서 아무 거나 하나를 찍을 수밖에 없다. 이때, 글자 뒤에 모음(母音)을 붙여서 읽어 보면 어느 글자를 말한 건지 알아낼 수 있다. 받침 바로 뒤에 모음이 오면, 받침은 모음과 결합되면서 원래 자신의 소리를 내게 된다.


* 빗, 빚, 빛

- 빗 + 에 → 빗에[비세]

- 빚 + 에 → 빚에[비제]

- 빛 + 에 → 빛에[비체]


전문용어가 많아지는 것 같으니, 다시 한국어 글자 집안의 엄마, 첫째, 막내로 불러보겠다. 한국어 단어마을에 이름이 '빛'인 가족이 살고 있다. 이 가족의 구성원은 첫째 ㅂ(자음/초성) , 엄마 ㅣ(모음/중성), 막내 ㅊ(자음/종성)이다. 이 마을에서 사는 가족의 구성원들은 반드시 한 집에서 한몸처럼 붙어 있어야 한다. 이때, 아기(자음)인 첫째(초성)와 막내(종성)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엄마(모음)가 모든 자식들을 챙긴다. 아기가 한 명인 집은 엄마가 첫째 하나만 품에 안으면 되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자식이 여럿이면 엄마에게는 여유가 없다. 아기들을 안고 또 업고, 달래고 있는 엄마를 떠올려 보자. '아이고~'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그러던 어느 날, '빛'의 옆집으로 '에'가 이사를 온다. 가족 '에'의 구성원은 엄마 ㅔ 한 명뿐이다. 첫째로 보이는 ㅇ은 엄마의 상상속 아기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어의 ㅇ(이응)은 초성에서 형태로만 쓰일 뿐 소리가 없으며, 종성에서만 소리를 갖는다.) 붙어 있는 집은 연달아서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단어마을의 규정이다. 그래서 두 집을 같이 '빛에'로 쓰고, 그 이름을 부르면 [비체]로 소리가 난다. 소리나는 대로 써 보니 두 가족의 구성원이 달라지는 게 눈에 들어온다. 옆집 엄마 ㅔ가 막내 ㅊ을 안고 소리를 내고 있다. 첫째가 없는 엄마 ㅔ가 자식을 갖고 싶은 마음에 막내 ㅊ를 몰래 데려간 건지, 아니면 막내 ㅊ이 집을 나가 무작정 옆집 엄마 ㅔ한테 안긴 건지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두 아기가 매달려 있는 엄마 ㅣ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옆집 엄마 ㅔ가 소리를 내야 하는 잠시나마 막내를 돌봐주는 건 아닐까? 요즘은 돈을 주고 돌보미를 쓰지 옆집 엄마에게 아기를 맡긴다는 걸 상상할 수 없겠지만, 일손이 부족할 때 이웃의 살림도 거들고 심지어 젖도 동냥했던 먼 옛날로 배경을 바꿔 본다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 현상을 나쁜 쪽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정작 자기 집에서는 자신의 소리를 잃고 차별받던 막내 ㅊ이 자신의 본래 소리인 [ㅊ]을 되찾고 있기 때문이다. 옆집 엄마는 막내를 막내로 대우하지 않고, 첫째와 똑같이 대우해 주고 있다. 이러니 막내도 첫째가 없는 옆집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 값, 흙

- 값[갑] ; 값 + 은 → 값은[갑슨]

- 흙[흑] ; 흙 + 은 → 흙은[흘근]


특히 자식이 셋인 집에서, 자리 싸움으로 치열하게 싸웠던 막내들은 옆집에 첫째가 없는 엄마가 이사 오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갑슨], [흘근]에서 보듯, 둘째는 나눠 쓰던 받침 자리를 넉넉히 혼자 쓰게 되니 얼마나 좋으며, 셋째는 첫째 대우를 받으니 얼마나 신이 날까? 둘 중 하나로만 나던 소리도 둘 다 제 소리를 갖게 된다.


막내는 옆집에 이사를 오는 어미(語尾)가족에게 '첫째가 없는 집'을 조건으로 붙이기도 한다.


* -(으)면

- 받으면 ← 받다 + -(으)면 ; '받'에 받침이 있으므로 '으'를 쓴다.

- 주면 ← 주다 + -(으)면 ; '주'에 받침이 없으므로 '으'를 쓰지 않는다.


위에서 보듯 어미가족 '-면'은 막내가 있을 때는 앞에 '으'를 데려와서 요구사항을 맞춰 주고 있다. '-(으)세요, -(으)니까, -(으)ㄹ 수 있다/없다, -(으)ㄴ 적이 있다, ...' 등등 수많은 어미가족들이 이렇게 이사를 온다.


물론, 막내가 내놓은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엄마도 있다.


* 맛있다[마딛따/마싣따] - 맛없다[마덥따/마섭따],

* 멋있다[머딛따/머싣따] - 멋없다[머덥따/머섭따]


'-있다'는 [마싣따], [머싣따]처럼 막내 ㅅ을 받아주지만, '-없다'는 그러지 않는다. 흔히 세상의 모든 엄마들의 자식을 향한 마음은 똑같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사랑의 모양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안다. 엄마 '없'에게는 '-없다'는 뜻 그대로 다른 집의 막내를 품어 줄 마음은 없어 보인다.


외국어를 배우다가 보면 이따금씩 황당하고, 막막하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말' 때문에 절망하기도 한다. 그런데 모국어를 '배워 보면' 그보다 더 당황스럽고, 기가 막히고, '말이 안 되다 못해 못 된 것들' 투성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렇게 많은 한국어의 못된 것들 중에서 이제 겨우 받침 하나를 다뤄 보았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이 바로 언어다. 이번 글에서 다룬 내용을 실제로 한국어 교실에서 가르칠 때면, 학생들에게서 가장 많이 돌아오는 말은 "왜?(Why?)"다. 다행히도 나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묻는 질문을 한 방에 이해시킬 수 있는 대답을 알고 있다. "나도 몰라. 내가 한국어를 만들지 않았어."


한글 맞춤법은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기초로 한다. 그후로 한글을 '소리나는 대로 쓰자'는 주장과 '형태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충돌해 왔다. 실제로 1954년에 이승만 정부는 '값을'을 소리에 따라 '갑슬'로 쉽게 쓰자는 한글간소화 방안을 제시했지만 당시 학자들과 국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이듬해 철회한다. 만약 그때, 아니 그 이후라도 한글을 소리로 적기로 했다면 지금 내가 쓴 이 글자들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글짜를 이러케 쓰면 애초에 망내에 대한 차벼리 지금과 가치 크지는 아낟껟찌만 소리로 쓰는 게 더 쉽따는 데에는 아무래도 동이하기 어렵따. 이렇게나 예쁜 막내다.



** 참고

대자보 <리승만 대통령, 한글은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라?>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38257§ion=sc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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