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 (4)

한국인의 국어생활 16

by 집우주

다시, 이번 주제의 첫 번째 글로 돌아가 보자. 당신이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의 조직위원회에서 참가국의 공식표기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호주와 오스트레일리아 중에서 무엇으로 할 것인가? 가나다 순에 따라 입장순번도 크게 달라지고, 이름은 자칫 민감한 이슈가 될 수 있기에 마음대로 고르면 안 될 것 같다.


음... 결정이 어렵다면 과거 사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열린 올림픽인 1988 서울과 2018 평창에서 두 번 모두 오스트레일리아(Austrailia)로 입장했다. 서울 때는 왠지 호주로 들어오지 않았을까 예상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당시 공식 표기로 한자어 국가명을 쓴 나라는 민주공화국(동독)과 연방공화국(서독)으로 입장했던 독일을 비롯해 미국, 소련, 영국, 인도, 일본, 중화인민공화국이 있다. (한국인은 지금도 이들을 영어 이름으로 잘 부르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호주만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왔으니 조금 의아했다. 옛날신문을 찾아보면, 이해가 된다. 1940년대 신문에 처음 등장한 오스트레일리아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한국인은 익숙한 이름을 찾는다. 개막식 중계화면에 오스트레일리아 선수단이 카메라에 잡히자 TV화면에는 두 글자 이름이 뜬다. 아나운서는 친절한 목소리로 "일명 호주"라며 '오스트레일리아=호주'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지난 세기 동안 '불란서'가 프랑스로 대체되어 사라졌고, '월남'이 전쟁을 경험한 특정 세대의 용어로만 남게 된 오늘날에도, '호주'는 여전히 건재하다. 한국어의 공식 표기는 오스트레일리아이지만, 한국인은 역시 호주가 편하다. 왜 그럴까? 호주로 쓰면 좋은 점이 많다. 우선, 오스트리아(Austria)와 헷갈릴 일이 없어진다. (88 서울 올림픽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다음으로 오스트리아가 입장했다. 두 나라는 가나다 순번도 비슷하다.) 한국 사회가 아직 영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을 살았던 한국인이라면 두 나라의 이름을 착각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1990년대까지도 공식석상에서 이름을 잘못 부르거나 문서에 오기(誤記)를 했다는 기사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공직자나 지식인들도 이렇게 실수를 할 정도였으니,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의 국민들이 어땠는지 말할 것도 없다. 괜히 유식한 척을 한번 해 보려다가 놀림감이 되는 것보다는 틀릴 가능성이 제로(zero)인 호주로 말하는 게 '안전빵'이었다. (놀랍게도, 오스트레일리아와 오스트리아를 헷갈리는 건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에게 최근까지도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나는 한국어에서 호주가 살아남아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단어가 짧은 데에 있다고 본다. 굳이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를 들고서 설명하지 않아도, 같은 것을 가리키는 단어가 여러 개가 있을 때 바꿔 써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글자 수가 적은 쪽을 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글자가 많으면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데 에너지가 더 많이 써야 하기 때문이다. 발음기관의 움직임을 최소로 하려는 건 인간의 본능이고, 인간의 언어활동이 진화한 모습이다. 한국어로 일곱 개의 글자를 발음해야 하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두 번만 읽는 호주는 비교대상도 되지 못한다. 영어로는 Austrailia[ɔ:stréiljə]가 3음절인데 음절 수를 세어보면 이마저도 호주보다 많다. 글자로 쓰면 더 확실해진다. 두 이름은 글자 수로 5자, 획수로 19획이나 차이가 난다. 컴퓨터로도 따져 보자. 호주는 QWERTY키보드에서 11번을 덜 치고, 디스크의 저장공간 10바이트(byte)를 아낄 수 있다. 한국인이 독일을 저머니(Germany)나 도이칠란드(Deutschland)로 절대로 대체하지 않는 데에는 불편한 발음이나 표기의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적은 글자 수'가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불란서는 프랑스가 되어도 글자 수가 똑같고, 월남과 베트남의 한 글자 정도야 감안할 수 있다. 하지만 호주와 오스트레일리아는 차이가 너무 크다. 아래는 한국어로 국가명이 일곱 글자가 넘는 나라들인데 이들 중에서 한국인의 일상 대화에 자주 오르고, 또 대체할 짧은 이름이 있는 나라는 하나밖에 없어 보인다.


* 오스트레일리아, 사우디아라비아, 트리니다드 토바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이름이 길면 손해다. 나쁠 건 없다 해도, 별 이득도 없다. 그래서 대체할 이름이 없을 경우에는 이름을 줄이는 방법이 사용된다. 예부터 중국인은 夏(하), 商(상), 周(주), ... , 宋(송), 明(명), 淸(청)처럼 한자(漢字) 하나만으로 나라의 이름을 지었다. 외국 이름은 거리에 따라 글자 수가 많아진다. 그래서 중국어로 나라이름을 보면, 보통 아시아 주변국들의 이름은 두 자, 대륙이 다르면 세 자 이상이 사용됐다. 옛날에는 물리적 거리가 멀면 왕래도 적었기에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연결되어 교류하는 오늘날에는 이름이 길면 효율이 매우 떨어진다.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강하거나 교역이 잦은 나라들은 거리에 상관없이 자주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英吉利國[Yīngjílìguó]가 英國[Yīngguó](영국)이 되고, 澳大利亚[Àodàlìyǎ]를 약칭인 澳洲[Àozhōu](호주)로 줄이는 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속도인 '더 빨리'에 응답한 결과일 것이다.


대한민국(大韓民国)을 한국(韓国)으로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네 글자를 매번 사용한다고 생각해 보자. 의미나 문맥상 꼭 필요하다면 백 번이든 천 번이든 써야 하겠지만, 일상적인 소통을 하는 상황이라면 한국이 훨씬 편하고 빠르다. 언론의 보도량이나 구글 검색결과 숫자만 비교해 봐도 한국은 대한민국을 압도한다. 그런데 합성어를 만들 때는 한국이라는 두 글자도 길어서 우리나라의 이름인 '한'만 사용한다. 단어 앞에 '한-'을 붙이면 '한국산(産), 한국식(式), 한국제(製), 한국형(型), 한국의' 등의 뜻이 된다. 로마자 공식국호인 코리아(Korea)에서는 K(케이)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글자다. 접두사처럼 K를 단어 앞에 붙이면 '한-'과 같은 뜻을 나타낸다.


* 한 ; 한글, 한복, 한식, 한옥, 한지, 한류, 한화, 한우, 한돈, 한의학, 한남/한녀, 한드, ...

* 케이(K) ; K팝, K리그, K뷰티, K좀비, K치킨, K방역, K청렴, K김치, K장녀, K드라마, ...


한은 주로 고유어나 한자어의 낱자와 함께 쓰인다. 복(服), 식(食), 옥(屋), 지(紙), 류(流), 화(貨)처럼 한국어에서 단독으로 쓰이지 않는 한자들과 짝을 이루는 게 특징이다. 반면 K 뒤에 오는 팝, 리그, 뷰티, 좀비, 치킨 등은 그 자체로 온전하게 쓸 수 있는 단어들이다. 주로 역사와 전통의 한국적인 것이 떠오르는 한과 달리, K는 알파벳이다 보니 아무래도 영어와 잘 어울린다. 그렇다고 단어를 만날 때 국적이나 출신을 가리지는 않는다. K가 만나는 상대를 보고 가끔씩 놀랄 때가 있다. 요즘은 단 한번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방역이나 청렴과도 만나고, 살다 살다 김치 옆에 있는 걸 보고 너무 기가 막혀서 뜬눈을 의심해야 했다. (앞으로 K한복, K비빔밥, K온돌 등등 말도 안 되는 투샷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혹시 '한-'과 'K-' 둘 모두와 어울리는 단어는 없는지 찾아보니 드라마가 있다. 그런데 드라마는 둘을 만날 때 변신을 한다. K를 만날 때 드라마는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한 옆에는 '드'만 있고 '라마'는 도통 보이지 않는다. 앞서 한이 주로 낱자와 짝을 이루는 걸 이미 설명했기에 라마가 자리를 피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는 '한드'이지, '한드라마'가 되지 못한다. 반대 조합인 'K드'도 영 이상하다. 위의 다른 단어들도 한과 K를 바꾸어 써 보면 발음과 소리가 어색하고, 의미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인은 일제강점기에 이어 전쟁까지 겪은 나라에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본 다른 이들은 '코리안 드림(Korean Dream)'을 꿈꾸며 우리나라를 찾고 있다. 한과 K에서 성장의 기쁨과 희망이 느껴진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상황은 달라진다. 지옥같이 살기 어렵고 희망이 없는 나라라는 뜻의 헬조선(Hell朝鮮)은 대한민국의 시계를 신분이 정해져 있던 중세 조선으로 되돌린다. 그후 신조어들에서는 금방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만, 시간여행을 따라 넘어온 그 옛날 조선의 관습들이 사회문제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한남/한녀'를 통해 오래도록 성별에 기인했던 혐오와 차별이 드러났고, 가족 내 부당한 대우에 대한 큰딸들의 설움과 분노가 'K장녀'로 표출되었다. 한에서 K로, 다시 조선에서 한과 K로 이어지는 신조어의 역사에서 시대와 세대별로 한국인이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읽힌다. 그 다양한 생각과 그 다름을 바라보고 있자니 대한민국과 코리아가 참 다르게 느껴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 대한민국 오~필승 코리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