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15
만약 누가 "베트남과 월남이 같다"고 하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가 베트남전쟁이 곧 월남전쟁이고 예전에는 베트남어(語)를 월남어라고 했다고 해도, 나는 "둘은 같지 않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베트남'하면 '쌀국수'이고, '월남'은 역시 '쌈'이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팀장님이 점심으로 '월남쌀국수'가 어떠냐고 하면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진다. 점심시간마저 직장상사와 함께해야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월남'에 '쌈'이 아닌 '쌀국수'가 붙었기 때문이다. 팀장님은 메뉴로 쌀국수를 골랐으면 '베트남'으로 시작했어야 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베트남쌈'을 먹자고 하시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1960~70년대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월남치마', 이 시기에 들어온 외래어종인 '월남붕어'도 베트남에는 없다. '베트남전쟁'보다는 '월남전(戰)'이 익숙했던 시대를 살았던 세대의 입에서 만들어지고 전해진 단어이기 때문이다. 한국어에서 '베트남'과 '월남'은 같은 나라를 가리킬 뿐, 두 이름은 다르게 쓰인다. 문법적인 측면에서 기인하는 구별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의 실제 언어생활과 관련한 관습적인 부분이 클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베트남과 월남을 바꾸어 써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쌈'이라고는 하지 않는 것처럼, 단어를 조합해서 만들 때 어느 단어는 둘 중 하나하고만 짝을 이룬다.
한국인이 베트남, 월남이라고 부르는 국가의 공식국호는 Việt Nam(비엣 남)이다.('비엣남'으로 쓰겠다.) 비엣남이라는 이름은 BC 180년 경 찌에우 다(Triệu Đà)가 세운 고대국가 '남비엣'에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베트남도 오랜 역사동안 중국의 영향과 간섭을 많이 받았다. 19세기 초, 자롱(嘉隆) 황제로 알려진 응우옌 푹 아윈(Nguyễn Phúc Ánh)은 베트남 지역의 통일을 꿈꾼다. 그는 1803년 청나라(大淸國)에 사절을 보내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베트남을 일컫던 명칭인 '安南(안남)'과 과거 참파(Chăm Pa: 현재 베트남 중남부) 지역을 부르던 '越裳(월상)'에서 한 글자씩을 딴 '南越(남월[남비엣])'을 국호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청에서는 과거의 남비엣이 연상된다는 이유로 거부하며, 대신에 글자 순서를 바꾼 越南(월남[비엣남])을 제시한다. 자기 나라의 이름조차 마음대로 지을 수 없는 현실이지만 국가통합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응우옌 푹 아윈은 이를 받아들인다. 越南을 한국식 한자음인 '월남'으로 읽는데 베트남어를 라틴문자로 표기하는 쯔꾸옥응으(chữ quốc ngữ)로 Việt Nam으로 쓴다. 영어에서는 알파벳에서 쓰지 않는 글자를 바꾸고 띄어쓰기를 빼서 Vietnam(베트남)이라고 쓴 것 같다. 역사를 알면, 그 이름이 달리 보인다.
베트남의 사례로 외국 국가명의 역사를 살펴봤으니, 같은 맥락에서 우리나라의 이름인 대한민국과 코리아에 대해 알아보자.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국호를 大韓(대한)으로 바꾸고 황제에 즉위한다. 大(대)는 '크다, 많다'는 뜻으로 당시에 나라이름 앞에 흔히 붙는 접두사이니 한(韓)이 이름이다. '한'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한반도 지역을 가리키는 단어로, 이 땅 위에서 쓰인 선조들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그러나 불과 십여 년만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후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상하이임시정부에서는 국호에 대해서도 논의를 해야 했다. 당시 새로 이름을 짓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대한으로 망했으니 다시 대한으로 흥해보자"는 주장에 힘이 실렸고, 1919년 4월 11일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임시헌장을 공포한다. 대한민국은 현재 우리나라의 공식국호인데 일상적으로는 '한국'으로 줄여서 사용한다. 한자문화권인 중국, 일본, 베트남에서도 같은 한자 韓國(=韩国)으로 쓰고 각각 Hánguó[한궈], かんこく[캉코쿠], Hàn Quốc[한꿕]으로 읽는다.
그러나 이 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우리나라를 코리아로 부른다. 앞서 올림픽 선수단입장 때 표기를 살펴본 Korea[코리아], Coreia[코레이아], Corée[꼬레], เกาหลี[까올리], कोरिया[꼬리야], كوريا[쿠리야]는 모두 '코리아'에서 기원하는 이름이다. 코리아는 고려(高麗 918~1392)에서 기원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고려 이후 500년 역사의 조선과 대한, 또 지금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이름이 몇 번 바뀌는 동안 왜 그들은 우리나라의 이름을 한 번도 업데이트하지 않은 걸까?
외국 사료에서 '고려'가 처음 확인되는 것은 13세기 경이다. 칭기즈 칸(Činggis Qaγan)의 몽골제국이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의 구전(口傳), 역사, 전설 등을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몽골에서 고려를 부르던 이름은 고올리(Gouli), 꾸리(Guuli), 가올리(Gauli) 등이었다고 한다. 서양의 문헌에 '고려'가 표기되는 것도 이 즈음이다. 몽골제국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유럽의 교황은 수도사 루브룩(Guillaume de Rubruck)을 파견하고, 그는 그때 보고 들은 것을 <몽골제국 여행기>라는 책으로 남긴다. 여기에 고려는 Caule로 등장한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에는 Cauli로, 이슬람의 라시드 앗 딘(رشیدالدین فضلالله همدانی)이 편찬한 역사서 <집사(集史 جامع التواريخ)>에는 Kao-li로 쓰여 있다. 외국어에서 [고]가 [까우/가오] 소리에 가깝게 표기된 것은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몽골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적었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한자 高는 중국 상고시대에는 [고]로 읽었지만 고대음에서 [가우]로, 근현대에는 [가오]로 발음이 변화했다. 그후의 서양 문헌과 지도에는 비교적 [고]가 정확하게 적힌 Gore, Gori와 일본 발음으로 적은 Coray, Corey도 보인다. 유럽국가들의 아시아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Core, Coria, Cory, Corij, Caoli, Kaoli, Corie로 제각각 표기되던 '고려'는 17~18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활약이 커지면서 Corea, Corée 두 표기로 좁혀진다. 영어에서 Corea로 쓰던 것을 20세기 일부 미국인이 별다른 이유없이 Korea로 바꿔 썼고, 그것이 굳어져 공식 로마자 국호로 인정되었다. (참고로 라틴어계열 언어에서 -a, -ia 같은 접미사를 붙여 '땅, 나라'를 뜻하는 단어를 만든다.)
물론 조선(朝鮮)도 등장한다. Tiauxen, Taucian, Chau Sien, Ciosen, Tchao Sien 등이다. 언뜻 표기가 의아하지만 옛날에는 '도셴/도션'에 가까운 발음이었다고 하니 이해가 된다. (실제로 조선 말기에 한글로 '죠션'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 사람들은 조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고, 공부도 너무나 부족했던 것 같다. 그들이 만든 지도에는 조선이 Corea의 수도(首都)로 쓰여 있거나 심지어 중국의 한 지방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진입한 사건에 대한 미국 측 기록에는 Corea, Korea, Chosen이 섞여서 쓰였다. 한 나라에서 쓰는 이름조차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이다. 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으로 개칭하면서 각국 공사관에 통보했는데 이에 외국 측의 답신을 보면 '대한'을 Taihan, Daihan, Tai Han으로 제각각 표기하고 있고 여전히 Korea, Corea, Corée가 덧붙여 쓰여 있다. 조선 정부는 국호를 바꾸면서도 알파벳으로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가이드를 제시하지 않았고, 그들의 표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한으로 이름을 바꾼 뒤로도 계속 '코리아'로 불리게 된 것이다.
문헌이라는 증거로서는 중세 고려시대에 코리아가 알려졌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앞선 고대시대에 세계인들이 '고리'를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미 기원 전부터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양의 교역이 활발했고, 또 5-6세기 경에는 아프리카에서 인도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는 해상길도 발달해서 이슬람 상인들이 신라까지 왕래했기 때문에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려(高麗 918~1392)는 고구려(高句麗 BC 37~642)를 계승한 나라다. 지금 우리는 '고구려', '고려'라고 쓰지만 당시 발음으로는 '고구리', '고리'가 맞다고 한다. 고구려는 4대 장수왕 때 고려로 개칭을 했으니, 이때의 고려도 '고리'였을 것이다. 그러니 코리아의 기원은 '고리(=고구리)'에 있지 않을까? 고구려에 살았던 북방 퉁구스계 맥족(貊族)과 백제·신라·가야의 한족(韓族)은 다르다. 저 먼 옛날 한국인의 조상들은 황해도 이남지역에서 신라로, 또 고려로 한 번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조선은 갖은 외세의 침입에도 600년동안 이 땅을 지켜냈다. 대한은 이런 역사를 계승하자는 의미를 담아 지었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일으켜 세우자는 뜻으로 다시 붙인 이름이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현재 한반도는 반으로 갈라져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쪽만의 대한민국이 되고 말았다.
나는 우리나라를 '코리아(South Korea)'로만 부르는 외국인에게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꼭 알려주는 편이다. 북한(North Korea)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단어는 '북+한국'의 뜻이며 공식국호는 '조선(민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알려준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우리를 '남조선'으로 부른다고 하면 매우 흥미로워들한다. 글자만 놓고 보면 '대한'과 '조선'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닮은 데가 별로 없다. 그런데 영어로 말해 보니, 남쪽이든 북쪽이든 둘 다 Korea가 들어있고, 로마자 공식국호인 R.O.K.나 D.P.R.K.에도 Korea가 쓰인다. 몇 번의 올림픽에서 남북한 선수단이 Korea로 공동입장을 했던 장면도 떠오른다. 이제 코리아는 단순히 외국에서 우리를 부르는 국가명을 넘어, 한반도의 남과 북이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유일한 이름이 되었다.
** 참고 **
<동남아시아사>, 소병국, 책과함께
<꼬레아, 코리아 서양인이 부른 우리나라 국호의 역사>, 오인동, 책과함께
프레시안 <한국과 몽골, 그 천년의 비밀을 찾아서>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3599#0DKU
주간동아 <고구려와 고려가 아니라 고구리와 고리로 불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