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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Nov 03. 2019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

  국내에서는 <너의 이름은>으로 이름이 알려졌지만 사실상 <초속 5센티미터> 이후 신카이 마코토는 이미 일본 애니메이션 혹은 영화팬들에게 이름이 알려졌다. 물론 나도 그 안에 속한다. 좀 더 일찍 그를 알아본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초속 5센티미터>를 보고 난 뒤에 거슬러 올라가 그의 초기작들을 봤고, 그 후 <언어의 정원>, <너의 이름은>을 봤다. 그리고 <날씨의 아이>가 개봉한다고 했을 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너의 이름은>은 일본 대지진 이후의 이야기다. 그동안 작품 내부에 머물러 있었다면(물론 상대적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본격적으로 내부에서 외부로 확장시킨다. 어떤 영화든 영화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역사 안에 존재하긴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의 이 변화는 분명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난 <너의 이름은>은 성공작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날씨의 아이>도 성공작은 아니다. 하지만 <날씨의 아이>는 엄청난 영화다.     


  이건 정치적인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 설마 싶었지만 이 영화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다시 전체주의로 물들 바에 다 같이 잠겨 죽자고. 혹은 200년 전으로 거슬러 가서 다시 한번 시작하자고.      


영화를 보자마자 신카이 마코토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이게 정말 반 아베적인 영화인지에 대한 물음. 신카이 마코토가 우익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랬을 때 이 텍스트는 완전히 다르게 읽힐지도 모르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을 찾을 수는 없었다. 검색의 게으름인지 정말 그가 발언을 조심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므로 난 이 주장을 밀어붙일 생각이다.     


  주인공 호다카와 히나는 부모가 없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호다카의 부모는 영화 속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목소리로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호다카의 부모가 진짜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히나의 엄마는 영화 시작하자마자 죽음을 맞이하고, 영화의 주된 시간적 배경에서는 히나 엄마가 죽은 뒤 1년 후부터 시작한다. 히나는 동생을 데리고 산다. 호다카가 도쿄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스다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 마치 유사 가족으로 보인다. 호다카라는 아이. 스다라는 아저씨. 나츠미라는 아가씨. 셋은 가족처럼 지낸다. 하지만 더 이상한 건 호다카가 히나와 만나게 되면서 히나와의 유사 가족을 이룬다는 것이다. 호다카라는 남자, 히나라는 여자, 그리고 히나의 동생이라는 아이. 그런데 여기서 그들의 진짜 가족은 해체되어 있다는 점이고, 그들 또한 해체된다. 호다카는 가출했고, 스다는 딸과 떨어져 산다. 그리고 결국 스다와 나츠미, 그리고 호다카의 사이는 깨지고, 호다카와 히나, 그리고 히나의 동생 사이도 깨진다. 물론 마지막에 호다카와 히나가 재회하지만 말이다. 지적하고 싶은 건 신카이 마코토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계속해서 부수고 있다는 것이다.     

  풀리지 않은 의문은 도대체 왜 비가 내리냐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관측 사상 이래에 가장 이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주장에 반박하는 노인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건 명확하지 않은 내부적인 텍스트다. 일본의 설화를 각색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설화를 모르기 때문에 설화로 해석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생각할 때는 2011년 대지진과 관계가 있다. 영화 속에서 내리는 비는 방사능이 섞여 있지 않을 수 없다. 히나가 비를 내리지 않게 하는 것은 어쩌면 일본 국민들이 방사능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과 같다면 어떠하겠는가. 그때 단지 맑은 날씨는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피폭의 문제다. 물론 방사능 문제에 있어서 일본의 미래에 대한 평가는 완전하게 갈린다. 무엇이 사실인지 판가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떤 학자는 일본은 이미 끝났다고 말한다. 그건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 자체의 문제로도 결부시킨다. 이제 조금 지나면 대지진의 참혹한 결과가 가시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이거나 혹 그 사실에 반박하고 있다. 더 이상 후쿠시마의 악몽은 잊으라고 강요하는 듯 일본 정부는 방사능에 대해 이제는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아베 정부의 최대 과제 중 하나는 후쿠시마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다. 1945년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이후 불과 66년 만에 다시 한번 더 고통 속에 휘말려 들어갔다. 아마 2011년 대지진의 트라우마는 히로시마보다 훨씬 길게 갈 것이다. 아베 정부가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는 일본의 제국주의 시절로 회귀하는 것이다. 일본이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절. 지구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었던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정말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 그 시절로의 회귀. 무시무시한 전체주의. 방사능이 섞인 비가 내리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한 명쯤 희생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극 중 스다도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한 명쯤 희생해서 날씨가 돌아온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영화 속에서 대지진의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구름 모양이 원폭의 모양을 띄고 있는 것이나 3년 후 도쿄의 모습이 멸망 직전의 모습이라는 점, 그리고 그녀가 날씨를 바꿀 때마다 이상 현상이 발생하는데 그건 마치 화학 약품들의 어떤 영향을 떠올리게 하는 것등 신카이 마코토는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미지를 영화 속에 심어놨다. 그 이미지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과 일본 사람이 받는 느낌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우리가 마치 바다 한복판에 배가 기울기 시작하는 이미지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 어떤 나라의 관객들보다 더 민감하고 절망스럽게 느낄 것이다.     


  잠시 정리해보자면 신카이 마코토는 지금의 일본의 방향성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반복하지만 그럴 바에 다 같이 빠져 죽는 편이 낫다고 외친다. 게다가 이 전체주의를 가족이라는 공동체부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강렬함과 충격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성공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신카이 마코토의 약점이다. 이 영화에는 이상하리만치 너무 태연하게 넘어가는 장면들이 많다. 간단하게는 총을 발견하고, 총이 떨어지는 위치. 그리고 그 총기에 대한 설명이 뉴스에서 한 줄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사실 총이 하는 역할은 크지 않다. 총이 없어도 이 영화의 전개는 아무 지장 없이 갈 수 있다. 게다가 경찰서에 잡힌 뒤 도망가는 호다카를 보면서 이건 좀 너무하지 않았나 싶었다. 경찰서에 잡혀 온 중학생이 모든 형사들을 따돌리고 도망 간다라. 그뿐만 아니라 히나의 동생 또한 변장을 하고 탈출한다. 이 부분은 납득될만하지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내부에서 개연성의 문제로 끊임없이 공격받을 수밖에 없다.      


  의아했던 점은 전체주의를 공격하는 영화에서 항상 나오는 장면이 이 영화에는 없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전체주의를 드러내고 싶었다면 분명 맑음 소녀 히나가 날씨를 맑게 해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다음 순서는 많은 사람들이 맑음 소녀가 재물로 바쳐진다면 기상 이변이 끝날 것임을 알게 되고 그 사람들이 맑음 소녀를 재물로 바치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장면이 나왔어야 한다. 하지만 그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신카이 마코토의 능력을 볼 수 있다. 구시대적인 이미지. 그건 분명 구시대적인 이미지다. 마녀사냥의 이미지. 일본 전체가 미쳐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그 이미지를 넣지 않은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일본 전체는 미쳐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장면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일본에서 미쳐있는 것은 일본 우익이다. 다시 제국주의로 회귀하자고 외치는 그 우익들. 두 번째는 스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생각만 그렇게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트럼프가 당선될 때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내비치지 않고 속으로만 품고 있다가 투표권을 행사할 때만 솔직하게 투표한다. 이 영화의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히나가 재물로 바쳐져 기상 이변이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쩌면 그들은 마음속으로만 간절하게 기도할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가설은 하나의 전제조건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이 히나의 능력을 알고 히나의 운명을 알아야 한다는 것. 하지만 사람들은 히나의 능력만을 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일어나지 않은 일로 추론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멀리 간 것은 아닌가. 아니, 히나의 능력만을 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너무나도 얌전하게 있는다. 그 능력이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그 능력이 반드시 누군가에게 필요할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그 비가 방사능 비라면?     

  어쩌면 히나가 티브이에 나왔을 때 일본 정부는 움직여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도 얌전히 있는 아베 정부. 신카이 마코토는 일본 정부를 등장시키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혹, 실제로 이런 일이 있더라도 아베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건 방사능 비가 아니니까.    


  영화가 끝날 무렵 호다카는 맑음 날씨를 의뢰한 사람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눈다. 200년 전 도쿄는 원래 물에 잠겨있었다는 말을 듣는다. 어쩌면 그때로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호다카는 그 말을 부정한다. 200년 전의 도쿄와 지금 물에 잠긴 도쿄는 완전하게 다른 것이다. 그리고 난 뒤 히나를 만나고 영화는 끝난다. 이제는 검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지만 일본 정부는 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 너무나도 궁금하다. 당신들 정책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멸망하는 게 낫다는 이 제스처를. 우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그 제스처를.      


  다시 한번 본다면 이 영화가 어떻게 다르게 다가올지 모르겠다. 아직 한 번밖에 보지 않았고 아직은 많은 담론이 나오지 않아서 이 모든 것이 너무 나아간 추론일지도 모른다. 다만 나아간 김에 한 가지 더 질문을 던지면서 글을 마치겠다. 히나의 엄마는 무슨 병으로 죽은 것인가? 만약 의문을 알 수 없는 병이라면? 이마무라 쇼헤이의 <검은 비>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픽픽 쓰러지던 인물들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국가가 나쁜 곳으로 향해갈 때 자국민들의 행동으로 그 나라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일본은 아직까지 괜찮지 않을까? 대지진 이후 일본엔 수많은 걱정이 담긴 영화가 나왔고 수많은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2019년 11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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