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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Oct 31. 2019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

언젠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누군가 공격할 때 그 공격이 마치 자신의 인격에 대한 공격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현상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2012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이후에 몇 번을 반복해서 봤을 때도 난 이 영화의 편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 속 설정들이 어떻게 인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깨달았을 때 이 영화는 단순한 멜로 영화가 아니라 한국의 지역 정치학이 배어 있는 영화라는 걸 알았다. 이 글은 그 근거들과 이 영화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는 쪽으로 이어질 것이다.     


  2012년 개봉 당시에는 지금의 평들이랑은 상반된 견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영화에 대한 전체의 평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건 순전히 나의 주관적인 느낌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영화 사이트에 접속했을 때 상당히 놀랐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이 너무나도 저급하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강간 방관자. 불륜. 데이트 강간. 아저씨 감성 등. 하지만 여기엔 어떤 논리도 없다. 그저 그냥 그렇게 느꼈을 뿐. 그 느낌이 만약 영화에서 온 것이 아니라면 영화를 보고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평들보다 만약 이 영화가 남성 영화라는 것으로 인해 여성 혐오적 요소가 들어 있다면 아마도 다른 부분을 건드려야 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이 영화는 여성 관객들에게 공격받을 여지가 다분하다. 그런데 제대로 된 공격을 보지 못했다. 공격들은 마치 마녀사냥처럼 이루어졌다. a라는 인간을 둘러싼 마녀의 논쟁. 마녀는 존재했는가. 아니, 이렇게 묻고 싶다. 마녀사냥을 끝낸 이들은 어디로 갔는가.      


   영화는 서연이 승민에게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절대 이렇게 말해선 안된다. 영화는 서연이 승민을 찾아가면서 시작한다. 이도 아니다. 영화는 서연이 제주도 집을 방문하면서 시작한다. 즉, 영화는 서연의 제주도 집을 증축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서연의 집이 증축이 완성된 다음 끝난다. 승민과 서연의 실패가 한 번 더 반복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이 영화가 따라가고 있는 승민과 서연의 동선, 그러니까 서연의 집을 증축하기 위한 행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쩌면 이용주 감독은 서연의 삶에서 받은 상처를 회복하면서 끝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반박할 것이다. 이 영화가 어떻게 서연의 영화냐고. 그렇다면 내가 할 답은 그건 이용주 감독이 실패해서는 아닌가요. 안일한 대답. 좀 더 보충해서 설명해보면 어른이 된 승민과 서연의 플롯은 서연의 동선을 따라가고, 어린 시절 승민과 서연의 플롯은 승민을 따라가는 것이라면 어떠겠는가. 그랬을 때 영화가 어린 시절 승민과 서연을 어른이 된 승민과 서연보다 전면화시키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면? 어른이 된 승민과 서연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승민의 감정보다 서연의 감정을 따라간다. 게다가 관객이 서연과 더 친해질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승민과 서연이 헤어진 뒤 승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다 서연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이 이어질 것이다.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과거가 전면화된 건 감독의 의도가 아닌가. 그 요소로 흥행을 하지 않았나. 많은 관객들이 그 요소에 마음이 가지 않았나. 맞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과거의 플롯보다 현재의 플롯이 전면화되기를 원했을 것 같다. 물론 이는 추론.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과거 플롯의 결말을 모를 수가 없다. 즉, 병렬 플롯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관객이 결말을 일찍이 알게 되는 플롯 쪽에 더 힘을 싣는다는 건 모험이다. 아니, 작품적으로 봤을 때 그건 의미가 없다. 이 영화를 보고 향수에 젖는다는 것은 영화가 좋아 서기보다는 영화가 관객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감성을 건드려서 그 관객에게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즉,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의 경험 속에 있던 기억과 그 기억이 시간이 지나면서 첨가된 환상. 그러니까 추억. 추억을 불러일으켜서 마치 그 추억 속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 이건 영화가 좋은 게 아니라 내 추억이 좋은 거다. 부분적으로 이 효과는 유효하지만 이 효과만 가지고 있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과거의 플롯이 전면화되어 살짝 가려지긴 했지만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인물들에게 주는 영향이다.


  어린 승민과 서연의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인가. 이걸 단순한 첫사랑의 실패로 읽는다면 이 영화를 다시 봐야 하지 않을까. 단순하게 첫사랑 영화라면 오랜 시간 동안 잊지 못한 첫사랑이 다시 찾아와(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이걸 첫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설명해도 그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다면 이건 멜로의 컨벤션을 이용하여 밀어붙이는 꼴이 돼버린다.      


  승민과 서연은 건축학개론 첫 강의 때 서로 만나게 된다. 그때 교수님은 집에서 학교의 길을 표시해보라고 하고, 승민과 서연은 자신의 동선이 같은 길이라는 걸 알게 된다. 같은 동선. 여기서 이 동선은 굉장히 중요하다. 만약 승민과 서연이 정릉에 살고 있지 않았다면 승민과 서연의 첫사랑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 살며, 같은 학교에 다니며, 같이 과제를 한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두 명의 인물이 끼어든다. 한 명은 승민의 조력자 납득이. 다른 한 명은 승민과 서연의 대학 선배. 이때 이 둘은 이들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는데, 납득이는 승민의 어리숙함을 도와주려고 하지만 오히려 악효과만 낸다. 한편 대학 선배는 서연이 승민을 좋아하기 전에 호감을 표시하던, 모든 대학 후배들의 우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납득이가 아니라 대학 선배다. 대학 선배는 강남에 산다. 압서방. 압구정, 서초동, 방배동. 부자동네. 게다가 차도 있고, 오피스텔에 살며 당시 갖기 힘든 최신형 컴퓨터까지. 게다가 키도 크고 잘생겼다. 엄친아다. 하지만 대학 선배는 여자에게 술을 먹인 뒤 잠자리를 하는 파렴치한이다. 어쩌면 그는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서연이 방송반에서 방송을 마치고 승민을 만나는 순간 대학 선배가 끼어든다. 그는 자신의 차를 뽐내며 서연을 조수석에 태우고 승민을 뒷자리에 태운다. 여기서 승민의 제스처는 자는 척이다. 보기가 싫었을 것이다. 대학 선배와 서연의 모습을. 압서방으로 이사하려는 서연. 왜 이사하려는 것인지 납득되지는 않지만 서연은 압서방으로 이사를 간다. 아마 제주도 출신이라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었을까. 감지된 불길한 기운. 대학 선배는 술 사준다고 하며 서연을 꼬드기기 시작하고, 급기야 승민이 입고 있는 게스 티를 짝퉁이라며 비웃음거리로 만든다. 여기서 서연은 같이 웃는다. 승민도, 서연도 대학 선배의 구질구질한 모습을 지적할 시선도 없었고,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시대는 1996년.      


  승민은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티를 벗어던지며 이사를 가자고 떼를 쓴다. 서연은 곧 이사를 간다. 강북의 촌 동네. 한국은 지방과 서울이 있고, 서울은 강남과 강북이 있다. 승민의 엄마가 화를 내자 승민은 대문을 발로 차고 나간다. 구겨진 대문. 후에 보게 되지만 어른이 된 승민은 구겨진 대문을 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펴지지 않는다. 무기력한 승민. 후회.     


  서연이 강남으로 이사를 한 뒤 승민은 납득이의 조언을 따라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고백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고백을 하지 못해 답답한 서연이 대신한다. 이들은 여기까지다. 이제 서연은 강남 여자다. 승민은 강북 남자고. 건축학개론 수업이 완전히 끝난 뒤 쫑파티를 하는 날 승민은 서연에게 고백하기 위해 서연의 집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린다. 서연은 승민이 오지 않아 걱정되어 승민을 찾지만 승민을 대신하여 서연 앞에 온 것은 대학 선배다. 다시 한번 지적한다. 때는 1996년. 서연은 대학 선배의 술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승민의 눈앞에 등장한 건 술에 취한 서연과 대학 선배. 승민의 머릿속에는 대학 선배의 집에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을 것이다. 이 장면이 중요하다. 대학 선배는 서연에게 키스하려고 하고 서연은 거절한다. 그런데 여기서 편집을 보는 것이 관건이다. 대학 선배가 서연에게 키스하려는 순간 서연은 거절하는데, 그 찰나에 쇼트가 전환되고 보고 있던 승민이 시선을 내리 깐다. 거절하는 서연을 정확하게 보지 못한 것이다. 아주 교묘한 편집. 그리고 난 다음 서연을 데리고 가는 대학 선배를 본다. 서연이 자신을 친한 친구로 대한 것인가? 서연은 자신에게 말했던 것처럼 대학 선배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인가? 무수히 많은 질문들이 승민의 머릿속에 떠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어떤 답도 하지 못한 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에 파묻혔을 것이다. 그리고 이 플롯의 클라이 맥스를 맞이한다.      


  이상한 클라이 맥스. 멜로 영화에서 클라이 맥스란 남녀가 헤어지던가 헤어질뻔한 뒤 다시 결합하던가. 즉,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플롯의 클라이 맥스는 승민과 택시 기사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충격을 받은 승민 앞에 택시가 선다. 그리고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정릉으로 가자는 승민. 이 시간에 강북으로 못 넘어간다는 택시 기사. 강남과 강북의 차이. 넘어갈 수 없는 공간. 승민과 서연의 거리. 여기서 택시 기사에게 욕을 하며 난리를 피우는 것은 사랑의 실패에서 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사랑의 실패가 한국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지역 정치학의 열등감에서 오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결국 그 건널 수 없는 거리를 걸어서 건넌다.      


  승민은 서연을 다시 만나 CD를 돌려준 뒤 말한다. 꺼져줄래. 분명 서연이 꼴 보기 싫은 게 아니라. 서연을 보면 강북에 사는 승민이 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승민은 서연에게서 자신의 열등감을 보는 것이다. 승민은 그게 보기 싫은 것이다. 이제 설명할 수 있다. 어른이 된 서연이 어른이 된 승민을 찾아왔을 때 왜 승민이 모른척하는지. 승민은 서연을 알면서도 모른척한다.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자신을 구렁텅이로 빠뜨린 그녀가 다시 찾아 온 것이다.      


  이제 어른이 된 승민과 서연을 이야기해야 한다. 서연이 처음 승민을 찾아왔을 때 승민은 서연을 최대한 거절한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서연이 불편했을 것이다. 강남여자 서연. 여전히 예쁜 외모에 사모님 복장으로 벤츠를 끌고 왔다. 승민은 그걸 비꼬기라도 하듯 서연을 공격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승민과 서연 둘은 서로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 상태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건 둘은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 여기서 이건 단순히 이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해결해야 할 무언가다. 둘은 서로 오해로 바라보고 있다. 승민은 서연에게 해명을 요구하지 않고, 서연은 승민에게 해명하지 않는다. 아니 아마 둘 다 못했을 것이다. 20살이니까. 여전히 둘은 그 해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그 해명의 유효기간은 끝났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서연은 이혼했고, 자신의 생활을 정리한 뒤 제주도로 내려오려고 한다. 승민은 어리고 예쁜 여자와 결혼한 뒤 미국으로 떠나려고 한다. 여기서의 미국. 여기서 미국은 그냥 외국으로 읽어선 안된다. 강북 출신 승민은 강남이 아니라 아예 미국으로 가는 것이다. 이때 이것은 도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 관계는 과거의 관계를 꼬아놓은 것이다. 승민과 서연 사이에 대학 선배가 있었다면, 지금은 승민과 서연 사이에 승민의 약혼녀가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승민과 그의 약혼녀 사이에 서연이 껴버린 꼴이다. 그때 쌍년이라는 단어는 승민이 서연에게 한 것이 아니라 승민의 약혼녀가 서연에게 던지는 경고다. 서연은 쌍년이라는 단어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이 그 쌍년이라는 것을 확인하기라도 하는 듯 그 쌍년이 나냐고 묻는다. 서연은 승민이 첫사랑이니까.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아마 서연은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연이 위자료를 얻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서연은 오열한다. 좆같다고. 다 좆같다고. 그녀의 과거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어린 시절 승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서연이 아닌 어른이 된 서연은 주체성을 얻게 되는 것으로 끝난다(고 생각 한다). 서연은 고백한다. 자신의 첫사랑이 너였다고. 승민이 하지 못한 걸 서연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연의 집은 증축되었고, 서연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으로 끝나지만 승민은 그러지 못한다. 구겨진 대문을 펴지 못하고 결국 미국으로 넘어가는 승민의 표정은 암담하다. 물론 여기에서 서연이 아버지에 얽매어 있다고 한다는 이유로 주체적인 여성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의견도 존중할 수 있다.     


  오히려 이 마지막 표정의 대비는 지역 정치학의 블랙홀에서 주체성을 잃은 남성과 주체성을 되찾는 여성으로 뒤바뀌어 끝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여성 영화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승민은 찌질한 게 아니라 어리숙한 것이다. 그건 서연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의 정서는 관객에게 추억을 소환하는 정서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주는 정서이기도 하다. 승민의 엄마가 짝퉁 게스 티를 입고 있을 때 한국 사람이라면 울컥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을까. 가난한 자는 시간이 지나도 가난하다. 그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면 칠수록 늪지처럼 빠져드는 가난. 이게 지금 한국에서 가난한 남자의 현실이라면 어떠하겠는가. 이용주 감독은 한국 남자가 실패하는 사랑에는 어쩌면 뼛속 깊은 지역 정치학의, 아니 더 넓은 의미에서 가난이라는 열등감이 주는 자기혐오가 내재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2019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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