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터 Y Nov 07. 2019

윤가은의 <우리집>

 윤가은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우리들> 다음 차기작은 아동 학대 문제를 다루는 영화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동 학대에 관한 작품들이 나오면서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우리집>이다. 그런데 <우리집>은 정말 아동 학대라는 문제에서 벗어난 걸까? 바꿔서 질문해보자. <우리집>은 무슨 이야기인가? <우리집>을 본 어린아이들의 많은 질문은 왜 결말이 없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결말이 없는 영화. 실패의 서사를 끌어안고 윤가은 감독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영화는 가족의 불화 속에서 가족의 평화를 되찾기 위한 아이의 투쟁(?)으로 보인다. 주인공 하나는 가족여행을 가게 되면 가족이 다시 화목해질 거라는 믿음으로 가족여행을 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근거는 과거에 좋지 않았던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가족여행을 가서 좋아졌다는 경험이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선 하나와 우연히 알게 된 유미와 유진이가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에서 이사를 가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이상한 순간들이랑 마주하게 되는데 나는 그 이상한 순간들을 모아서 <우리집>이라는 영화의 이야기를 재정립하고자 한다. 영화를 보고 찜찜한 기분은 아마도 우리가 기대하는 이야기에서 무언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인데 그건 이 이야기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외의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는 방학식 날 선행상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행을 가는 5인 가족을 본다. 첫 번째 질문은 왜 4인 가족이 아니라 5인 가족 인지였다. 유미네 가족은 5인 가족이다. 엄마, 아빠, 삼촌, 유미, 유진. 여기서 중요한 건 여행을 가는 5인 가족은 유미네 가족이라는 것이다. 뒷모습이긴 하지만 유미는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다. 하나는 유미네 가족을 보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와 가족여행 사진을 본다. 바다에서 찍은 가족사진. 그때도 엄마와 아빠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가족 여행을 다녀온 뒤 좋아졌다면서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오빠에게도 가족여행을 가자고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니까 하나는 유미네 가족이 여행을 가는 것을 보고 가족여행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즉, 이 이야기의 시작점은 하나가 유미네 가족을 보고 난 다음이라는 것이다. 그다음 장면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 하나를 보여준다. 여기서 하나는 유미와 유진이를 보게 된다. 두 번째 질문. 그 아이들은 가족여행에서 돌아온 것인가? 그렇다면 가족여행에서 돌아올만큼의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하나와 유미, 유진이는 소소한 사건들 이후 친해진다. 하나가 유미네에서 오므라이스를 아이들에게 해준 뒤 토마토 화분을 본다. 그러고 나서 하나와 유미, 유진이는 물총 싸움을 하게 되는데 그다음 장면은 무엇인가. 자고 있는 하나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웃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물총 싸움하면서 아이들이 웃는 소리를 이 장면의 앞부분까지 연결해 놨다. 이건 하나의 꿈인가? 하나의 꿈을(잠이 아니라) 깨우는 건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소리다. 싸우는 소리 때문에 웃는 하나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마침내 하나가 깬다. 방 문을 열어보니 엄마와 아빠가 싸우고 있고, 오빠가 나와서 가세한다. 여기선 4가지 질문이 파생한다. 첫 번째는 그건 꿈이 맞는가. 두 번째 꿈이라면 유미와 유진이는 꿈에서만 만나는 것인가. 세 번째 꿈과 현실이 섞여 있는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꿈은 엄마와 아빠의 불화 때문에 꾸는 것인가.     


 그런데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유미와 유진이가 하나의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상한 지점이 발생한다. 하나가 오빠 찬이를 미행하여 여자친구 만나는 장면을 보면 우리는 하나가 찬이와 그의 여자친구 보라의 애정행각을 핸드폰으로 찍는 것을 보게 된다. 이후 이 증거자료(?)는 찬이가 엄마와 아빠에게 가족여행을 가자고 이야기하게 하는 용도로 쓰이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때 유미와 유진이가 등장한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런데 그 장면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찬이와 보라는 유미와 유진이를 본 게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찬이와 보라에게 그들의 웃음소리로 인해 미행 사실을 들키면서 한 대화를 떠올려보자. 찬이는 하나에게 왜 거기 있냐고 묻자 하나는 오빠는 학원을 안 가고 왜 거기 있냐고 묻는다. 그러자 보라는 찬이에게 동생이냐고 묻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동생들이 아니라 동생이라고 말한 지점이다. 하나와 유미, 유진이는 3명인데 보라는 마치 한 명만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다음 편집 또한 이상하다. 이다음 이어져야 할 장면은 이 증거물(?)을 가지고 찬이를 협박(?) 해야 하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그 다음 장면은 화채 먹는 장면으로 대체된다. 이 장면에서 부동산 중개업자와 집주인, 새로운 세입자가 집을 보러 오게 되는데 아이들은 그들을 내쫓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난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와 찬이를 협박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하나의 성격상 그날 저녁 찬이에게 그 증거물을 들이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장면들 사이에 부동산 중개업자와 집주인, 세입자와의 소동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찬이와 보라를 몰래 찍고 난 다음 유미네에서 화채 먹는 장면으로 넘어가면 하나의 옷이 바뀌었다. 즉, 날이 바뀐 것이다. 그러면 하나는 그날 저녁 찬이에게 가족여행을 가자고 이야기해달라는 걸 요구하지 않았던 걸까. 장면 순서를 봐보자. 찬이와 보라의 데이트, 그다음은 유미네서 화채를 먹다가 집 보러 온 사람들을 내쫓는 장면, 그다음은 다시 하나의 집으로 와서 찬이에게 증거물을 들이대며 가족여행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이다.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을 쫓아내고 난 다음 하나, 유미, 유진의 3쇼트로 장면이 종결되고 그다음은 하나가 어딘가를 보고 있는 바스트 쇼트로 이어진다. 하나는 어딜 보고 있는 걸까. 물론 금방 그 답을 알 수 있다. 찬이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걸 기다리며 화장실 쪽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집은 마치 무언갈 상상한 듯한 느낌이다. 즉, 하나가 무언가를 상상하다가 찬이가 나와서 찬이에게 말을 거는 듯한. 그렇다면 다시 질문이 파생한다. 유미와 유진이는 꿈속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상 속에서도 등장하는 것인가.      


 상영시간 92분의 짧은 시간 속에서 우리는 통화하는 장면을 상당히 많이 보게 된다. 그런데 이 통화하는 장면만 떼어놓고 보면 여기서도 이상한 부분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 통화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서 수화기 너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가? 들을 수 있었다. 하나의 아빠 핸드폰으로 주 대리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주 대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단 한번도 유미가 그토록 많은 통화를 하는데도 유미의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공중전화로 주 대리에게 복수(?)를 할 때에도 우리는 주 대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기준은 무엇일까? 관객이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기준은. 꿈이나 상상 속에서의 통화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하나의 현실에서의 통화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라면?      


단순히 질문을 나열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유미와 유진이는 맨 처음 등장했을 때, 그러니까 방학식 때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족여행을 가는 유미와 유진이가 유일하게 하나가 만난 실제라고 생각한다. 그다음에 나오는 유미와 유진이는 하나의 꿈, 그리고 상상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가족 해체의 위기 속에서 만들어낸 영화. 하나의 유일한 친구들. 좀 더 이 의견을 보충해보도록 하자.      


 유미와 유진이가 하나의 집에 놀러 온 것은 단 한 번이다. 그런데 그때 유진이는 정말 큰 실수를 한다. 하나의 엄마 노트북에 우유를 쏟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는 엄마에게 자신이 우유를 쏟았다고 말한다. 물론 이는 그럴 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하나는 무서워서가 아니라 엄마와 사이가 더 멀어질까 봐, 가족여행을 더 못 가게 될까봐 바로 이야기를 안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그럴 수도 있는 부분을 이렇게 보면 어떠한가? 그 우유는 정말 하나가 쏟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는 그걸 알고 있다. 하나가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가정해보자. 유미와 유진이가 하나의 꿈과 상상 속 인물이라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의문점을 툭툭 던져놓고는 시치미 뚝 떼고 유미와 유진이가 진짜 있는 인물처럼 그려놓는다. 대다수의 관객도 거기에 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하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하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했던 그런 공상처럼. 하나는 그것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걸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어떠한가.         


 가족여행이 결정되었을 때 관객들은 그게 하나의 뜻처럼 화목함을 위한 가족여행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찬이는 이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나는 전날 가족여행이 이별여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집에서 도망쳐 나온다. 오전 7시 46분. 하나는 놀이터에서 그네에 앉아 있다가 흙바닥에서 소라를 줍게 된다. 유진이와 첫 만남 때 줬던 것이랑 아주 똑같은 것이다. 흙먼지의 흔적조차 없는 그 소라를 줍고 하나는 유미네로 향한다. 유미네도 상황이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때마침 유미의 부모님이 연락이 되지 않자 하나는 유미에게 부모님을 만나러 가자고 제안한다. 하나의 가족여행이 유미와 유진이와 가는 가족여행이 된 것이다. 하지만 보리해변은 어린아이들끼리 가기엔 너무나도 먼 곳이다. 하나는 유미와 가면서 내내 티격태격한다. 끝내 유미는 돌아가자고 하고 하나는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돌아가냐며 싸운다. 난 유미와 유진이가 나오는 장면을 하나의 꿈이나 상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어쩌면 하나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집에가자.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집에 가.      


 산전수전 끝에 아이들은 해변으로 도착하지만 그곳이 보리 해변인지 아니면 다른 해변인지 알 방도가 없다. 이쯤 되면 이렇게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유미의 엄마와 아빠는 존재 하는 걸까? 목소리도 들은 적이 없다. 방학 동안은 삼촌이 돌봐준다고 했지만 삼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볼 수 없다. 우리는 다시 떠올려봐야 한다. 유미와 유진이가 하나에게 고마워서 치킨을 먹고 가라고 한 날 하나는 밥은 가족이랑 먹어야 한다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집에서 혼자 밥을 차려놓고 아무도 없는 식탁에 혼자 앉아 있는다. 유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하나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유미와 유진이도 밥을 먹지 못한 것 같다. 치킨을 사 온다던 삼촌은 아직 안 온 것인가. 아니면 올 수가 없는 걸까. 혹, 하나가 아직 밥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삼촌은 도착하지 않은 걸까. 해변에서 유미의 엄마에게 전화가 오지만 핸드폰 배터리는 방전된다. 하나의 핸드폰도 잃어버렸다.  


 시간은 흐르고 해는 저물어간다. 그런데 기적처럼 그들에게 보금자리가 생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않은가? 때마침(!) 캠핑을 즐기던 부부. 하지만 임신을 한 아내는 예정일이 많이 남았는데 산통이 오고 남편은 캠핑 장비를 모두 놓고 아내를 데리고 병원으로 떠난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곳에서 남은 음식들로(사실 은박지로 쌓여 있는 이제 막 구운 것처럼 보인다) 배를 채우고 텐트 안에서 잠을 청한다. 그런데 이 텐트 안을 보면 아이들을 위한 베개가 준비되어있다. 성인 두 명이 캠핑을 왔는데 아이 베개가 있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기적. 가족여행에서 자는 첫날밤. 유진이는 여기가 우리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하나는 우리 집 하자고 대답한다. 유미가 하나의 집에 방문해서 집을 둘러보더니 부러운 눈빛으로 좋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하나는 하나도 좋지 않다고 답하면서 유미네 있는 마당도 없고, 장난감도 없고, 토마토 화분도 없고, 꽃도 없다고 말한다. 유미는 멋쩍게 웃지만 아마도 하나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나가 원하는 건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가족이다. 집 안에 가족이 없으면 그건 집이 아니다. 그들은 가장 좋은 집 안에서 단잠을 잔다.      


 이제 좋지 않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하나와 유미, 유진이는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온다. 유미는 하나에게 우리가 이사를 가도 우리 언니를 해줄 거냐고 묻는다. 하나는 너희가 이사를 가도 너희 언니를 할 거라고 답한다. 그런데 이 말은 반복이다. 계속해서 반복된다. 토마토 화분에서 떨어진 토마토를 바라볼 때 유진이는 하나에게 언니는 토마토를 따도 된다고 말한다. 토마토 화분 팻말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건 유진이가 하나를 가족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해변에서 유미와 하나가 싸울 때 유미는 우리가 남이냐고 묻는다. 그러니까 이미 이들은 가족 구성원인 것이다. 한쪽의 가족이 무너질 때 한쪽의 가족은 더 견고해지고 있다. 하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아무도 없는 집 안. 그리고 하나는 자신이 만든 요리책을 본다. 비빔면도 해줬고, 오므라이스도 해줬지만 아직 김치볶음밥과 계란 토스트를 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가족들이 돌아온다. 여기서 다시 질문. 정말 하루가 지난 걸까? 밥 먹자고 말하는 하나에게 찬이는 말한다. 경찰서 가서 신고하고 난리가 났었다고. 그들은 경찰에 신고를 하고 온 걸까? 하루가 지나서야? 아니면 하나가 없어진 날 신고를 하고 밤새 찾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온 걸까? 일반적인 경우를 생각해보자. 가출, 실종, 그 어떤 경우여도 경찰에선 집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한 거다.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그때 집에 아무도 없다면 그 아이가 느끼는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가 돌아왔을 땐 아무도 없었다. 하나가 전화를 받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들은 하나를 찾으러 나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찾아도 하나가 나타나지 않자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이다. 경찰에서는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말했을 것이고, 집으로 돌아오자 하나가 돌아와 있는 것이다. 하나는 가족들에게 밥 먹자고 말한다. 든든하게 먹은 뒤 진짜 여행을 준비하자고 하는 하나. 어쩌면 하나는 유미와 유진이를 통해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 것은 아닐까? 12살의 아이가 받아들이기에 부모의 이혼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윤가은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우리들> 다음 차기작은 아동 학대라는 문제를 다루는 영화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동 학대에 관한 작품들이 나오면서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우리집>이다. 그런데 <우리집>은 정말 아동 학대라는 문제에서 벗어난 걸까? 아동 학대는 아동을 신체적, 성적, 심리적으로 학대하거나 돌보지 않고 방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돌보지 않고 방치. 하나는 누가 돌봐줬던 적이 있는가? 우리는 영화에서 하나를 돌봐준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고 절대 오해하면 안 된다. 하나의 심리적 상태가 유미와 유진이를 만들어냈고, 거기서 혼란을 빚고 있다고 오해하면 안된다. 분명하게 말했지만 하나는 유미와 유진이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건 압박감에 못 이겨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하는 상상의 일부처럼, 우리가 꾸는 꿈의 일부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별을 준비했던 것이다.     


 이 서사는 확실하게 실패다. 우리가 성장영화에서 바라는 어떤 깨달음이 없다. 우리가 기대하는 이야기의 참신함이나 독창성, 장르적 쾌락도 없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어떤 특출난 장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윤가은 감독은 아동 학대라는 현장 속에서 아이가 굳건하게 버틸 수 있기를, 하나 스스로가 이 상황을 견디어 낼 수 있는 걸 바라는 것 같다. 가정이라는 공간이 폭력적으로 변하면 아이는 그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 이건 어쩌면 우리 사회의 긴급한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난 윤가은의 <우리집>을 응원한다. <우리집>을 본 관객 모두가 하나를 응원하기를 바란다. 


  2019년 09월 03일

작가의 이전글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